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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4. 돌이킬 수 없는 길

 비도가 돌아가고 나서 무길은 홀로 대장간을 지켰다. 대장간의 불을 지키는 당번이 나오려면 한 식경쯤 시간이 남아 있었다. 무길은 아무도 없는 대장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길은 발을 구르며 초조한 마음을 눌렀다. 

 "왜들 이렇게 안 오는 거지?"

물을 길어오고 숯을 옮기는 대장간의 막내도 오늘따라 늦장을 부리는 모양이다. 대장간에 회색 수염이 없으니 아무래도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무길은 며칠 전 보았던 회색 수염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먼 길을 떠나는 것처럼 긴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무길은 망토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것을 눈여겨보았다. 회색 수염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한 며칠 대장간을 비우려고 한다. 내가 없더라도 대장간 단속을 잘하거라."

 "저……."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이냐?"

 회색 수염이 무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길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아닙니다."

 "내가 없는 동안 칼을 잘 마무리해서 보내도록 하거라."

 "잘 알겠습니다."

 언제나처럼 회색 수염은 꼭 필요한 말만 했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빠른 걸음으로 대장간 마을을 빠져나갔다. 무길은 막 달려가 회색 수염을 잡으려는 자신의 마음과 싸웠다. 


 '제 눈에 비도가 보입니다.'

 회색 수염에게만은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무길은 알고 있었다. 회색 수염은 원칙에 벗어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무길을 아끼는 것도 대장장이로서의 능력을 높이 사는 것이지, 무길에게 사적으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회색 수염은 누구보다도 선계의 법도를 중히 여겼다. 

 "비도를 상대하는 일은 결국엔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야."

 무길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무길은 잡념을 떨구려 애쓰며 대장간을 둘러보았다. 구석구석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색이 변한 나무통이며, 벽에 걸린 망치, 반질반질한 모루…….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대장간 안을 채웠다.

 무길은 자신이 대장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새삼 느꼈다. 


 "선인의 동자가 오면 나는 칼을 내주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그럼 비도란 놈도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무길은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말을 했다. 무길은 청소를 한다, 물을 떠 온다 괜스레 부산을 떨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무길의 코끝에 향기로운 꽃내음이 맡아졌다. 무길은 순간 멈칫했다. 발소리가 들린 것은 아니지만 선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진명 선인이 앞마당에 서 있었다. 무길은 서둘러 대장간 밖으로 나가 선인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간 정령 무길입니다."

 무길은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했다. 그것이 선계의 정령이 선인을 맞는 법도였다. 게다가 진명 선인이 누구이던가? 상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며 선계의 살림을 도맡아 꾸리는 선관이었다.  


 진명 선인은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얀색 바짓부리와 소매 끝에는 색실이 수놓아져 있었다. 특별한 날에 입는 예복을 갖추고 있었다. 무길은 칼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안으로 들어온 진명 선인이 대장간 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주문한 칼을 찾으러 왔다네. 다 되었는가?"

 "예. 칼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직접 오셨습니까?"

 "칼을 주문할 때, 한 가지 빠트린 것이 있어서 이리 왔네."

 진명 선인이 무길에게 작은 꾸러미를 건넸다. 무길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꾸러미 안을 확인한 무길은 깜짝 놀랐다.

 "선녀들이 일 년에 한 올씩 뽑아낸다는 금실 아닙니까? 이것을 어찌……."

 "이 칼의 손잡이에 금실을 감아야 하는데. 동자 녀석이 깜박 까먹은 모양이네. 이   것이 아직도 내 방에 있는 것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온 길이네."

 진명 선인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심부름을 제대로 하지 못한 동자에게 역정을 내고 왔기 때문이었다. 


 무길은 칼을 가져오기 위해 돌아섰다. 칼집에 넣은 칼은 벽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손잡이를 쥔 순간, 무길의 가슴에 용암이 분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이런 칼을 만들 수 있을까?"

 수십 년 동안 한 번 만들기도 어려운 칼이었다. 무길의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가지를 뻗어 올렸다. 진명 선인의 목소리가 무길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칼을 자세히 보고 싶구먼. 이 쪽으로 와서 할 수 있겠나?"

 선인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길은 굳은 얼굴로 선인 쪽으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 칼을 내려놓자 진명 선인이 감탄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회색 수염이 말한 대로 대단한 솜씨구만. 허허… 수고 많았네."

 "과찬이십니다."

 무길은 꾸러미 안에서 금실을 꺼냈다.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져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무길이 칼을 집어 들고, 손잡이에 얇은 금실을 천천히 감았다. 

 무길의 두 눈이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무길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눈이 빠질 듯이 아파왔다. 마음속에서 작은 속삭임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길 네가 만든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쇠다. 쇠를 가져라."

 무길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칼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진명 선인이 무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무길, 이상하구나.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아라."

 진명 선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길의 솜씨를 칭찬하던 목소리와는 딴판이었다. 무길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하던 일을 계속했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고 했다."

 선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순간, 무길의 고개가 위로 확 제겨졌다. 무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이었다. 

 무길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화가 치솟았다. 무길은 진명 선인의 눈을 쏘아보았다.  유난히 짙은 선인의 눈썹이 보였다. 유난히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는가 싶더니, 눈동자가 두 개로 벌어졌다. 무길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말로만 들었던 겹눈을 가진 이가 바로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네 개의 눈동자를 가진 선인. 그들의 눈은 마음속에 감춰진 비밀을 찾아내고, 숨기고 싶은 진실을 볼 수 있었다.  


 "네 눈에 욕망이 가득하구나. 불같이 타오르는 욕망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구나. 어서 칼에서 손을 떼거라."

 진명 선인이 꾸짖듯 말했다. 무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칼을 내려다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거칠었던 무길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무길은  조심스레 칼을 내려놓았다. 진명 선인이 가늘게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무길의 손이 잠시 허공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칼을 향해 뻗었다. 순간 칼이 움찔하면서 탁자 위에서 공중을 향해 떠올랐다. 


 "이게 무슨 짓인가?"

 진명 선인이 버럭 화를 냈다. 무길은 달리는 말 위에 훌쩍 올라탄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무길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진명 선인을 향해 돌아섰다.

 "너 같은 떠돌이 정령을 받아준 것이 잘못이었다. 너는 암흑의 동굴로 가라. 욕망과 집착으로 가득 찬 정령은 더 이상 선계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무길은 진명 선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고 칼을 휘둘렀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무길은 자기 발 밑에 쓰러진 진명 선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인의 흰옷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무길은 대장간 바닥에 앉아있었다. 자신이 벌여놓은 엄청난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길은 진명 선인의 몸에 조심스럽게 손을 대 보았다. 그 순간, 선인의 몸에서 수많은 나비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흰나비들은 거칠게 날갯짓을 하며 무길의 몸을 감쌌다. 무길은 눈조차 뜰 수 없었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무길은 벌떡 일어나 칼을 휘저었다. 칼 손잡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나비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그제야 나비 떼는 줄을 지어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무길은 진명 선인이 누워있던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명 선인의 몸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하늘에서 갑자기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무길이 밖을 내다보니, 검은 안개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안갯속에서 비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비들이 금방 선인청에 도착해서 이 일을 알릴 거야. 그러니 빨리 자리를 피해야지."

 무길은 처음으로 비도의 목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이대로 암흑의 동굴에 끌려가 물거품으로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이 순간, 비도의 말은 무길에게는 유일한 출구였다. 오른쪽 손에 들고 있는 칼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손잡이를 다시 한번 꼭 쥐어보았다.


  비도가 웬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걸 네 이마 위에 붙여라."

 무길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종이쪽지에는 검붉은 색으로 알 수 없는 글씨 같은 것이 쓰여 있었다. 

 "이게 뭐지?"

 "이건 선인들 눈에서 몸을 숨겨주는 부적이야. 지금쯤 선계의 문 주위에 선인군들   이 쫙 깔렸을 걸. 네 놈이 그물에 걸리면 나도 손을 쓸 방도가 없어. 일단 선인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최선이지."

 무길은 비도를 쏘아보며 이마에 부적을 붙였다. 순간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무길의 몸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비도가 혹시 자신을 속인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곧이어, 이마 위에 얼음을 얹은 것처럼 차가운 기운이 돌았다. 찬 기운은 서서히 내려와 무길의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손끝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시렸다. 무길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살가죽이 사라지고, 혈관이 사라지고, 뼈가 사라지고 그다음 손은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믿을 수 없어 손을 흔들어보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허공뿐이었다.

 "헉 이럴 수가."

 무길이 탄성을 내질렀다.

 "비도를 의심하지 말라고. "

 비도가 어깨를 으쓱대며 말했다. 무길은 뜨끔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손만이 아니었다. 무길의 몸과 몸에 걸친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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