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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숙현 Jul 15. 2023

5. 북쪽 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었다. 무길이 손을 뻗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잡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막막했다.  

 "어디로 가라는 거야?"  

 무길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이 멍청한 놈아. 부적을 붙이고 있는 놈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냐고? 누가 네 목소리라도 들으면 끝장이라고."

 비도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비도는 무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앞장을 설 테니깐 네놈은 내 흔적을 찾아 따라와라."

 예의 그 차가운 기운이 무길의 얼굴을 쓱 문지르며 지나갔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지만 무길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안갯속에서 뭔가를 가늠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기가 느껴지는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니 안갯속에 작은 구멍이 쑹쑹 뚫렸다. 무길은 구멍을 좇아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안개 너머에서 선인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장이 무길이 진명 선인을 해치고, 칼을 훔쳐 달아났다."

 "무길이라고요? 아니, 그 말도 없고 얌전하던 무길이……."

 "그러게 떠돌이들은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법이야. 칼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어서 잡아들이도록 하세."

 그들은 대장간 쪽으로 말을 몰아가는 중이었다. 선인군들이 탄 말들이 '히잉' 하고 울었다. 말들은 안개 속에서 두려움에 떨었다. 선인군들은 말을 모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안개 속에 구멍은 더 이상 새로이 생겨나지 않았다. 무길도 제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무길은 칼을 비켜 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이 지나자 다행히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비도가 속삭였다. 

 "이제 정말 서둘러야 해."

 비도가 만드는 구멍이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무길은 거의 뛰다시피 비도를 쫓아갔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무길은 빠르게 지쳐갔다. 무길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마치 허공을 걷는 듯 휘청거렸다. 

 "온몸의 뼈가 다 시려서 견딜 수가 없어. 도대체 이 부적은 언제 뗄 수 있는 거야?"

 무길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부적이 싫으면 지금 당장 떼지 그래? 선인군이 단숨에 달려올 거야. 클클클."

 비도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무길은 정신이 바짝 들었다. 안간힘을 내며 비도의 뒤를 따랐다. 

  계곡 중간에 보초를 서고 있는 선인군의 모습이 보였다. 무길은 겁이 덜컥 나서 걸음을 멈추었다. 선인군이 떠돌이 정령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선계에 비상이 내려져 있다. 달아난 대장장이 무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땅 속으로 들어가라."

 "대장장이 무길이라고요? 

 키가 작은 정령이 깜짝 놀라 물었다. 무길은 두어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머리 한쪽이 깨질 듯 아파왔다. 


 비도는 겁내지 않았다. 비도는 잠시 선인군의 몸에 자신의 존재를 겹쳤다. 순간 선인군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떠돌이 정령이 놀라서 얼른 달아났다. 

 "빨리 지나가라고. 힘들어 죽겠으니깐." 

 비도의 말에 무길은 선인군 앞을 '쓱' 통과해 지나갔다. 선인군은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무길은 선인군이 입고 있는 갑옷을 보았다. 두어 해 전, 자신이 쇠판을 얇게 두드려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 갑옷을 만들 때에는 선인군에게 쫓기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도가 재촉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어서 가자."

 비도가 자신의 존재를 떼어내자 선인군이 푹 쓰러졌다. 


 그러는 사이, 안개가 조금씩 옅어지며 시야에 뭔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자신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이 풀린 것처럼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무길은 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양쪽으로 집채만 한 바위들이 버티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 틈새 같은 길 위였다. 바위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 무길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저기 저 골짜기로 들어가면, 밤까지 몸을 숨길 수 있어. 저곳에 가면 부적을 뗄 수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비도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좁디좁은 골짜기 속에서 비도와 무길은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비도는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무길의 부적을 떼었다. 부적에서 연기가 폴삭 하고 피어오르더니,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며, 무길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도가 자신을 보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클클클. 네 욕망이 이 칼에 생명을 주었구나."

 무길은 일어나 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저 명을 받고 칼을 만들었을 뿐이라고."

 "네가 거짓을 말해도 소용없다. 선계의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쇠를 탐했잖아. 욕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칼을 만드니, 칼이 피를 부른 게지."


 무길은 진명 선인이 쓰러지던 순간을 떠올렸다. 처음에 무길은 칼을 집어 들지 않았다. 그저 짧은 순간, 칼을 가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무길이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에 칼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단칼에 진명 선인을 내리쳤던 것이다.

 무길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두 손 위에 올렸다. 손바닥 위에 묵직한 칼을 올려놓자 가슴속에서 뭔가가 꿈틀 하고 움직였다. 그것은 무길의 안에서 살아 숨 쉬던 어린 짐승이었다. 무길을 괴롭히던 자책도, 두려움도 서서히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림자 비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네 놈한텐 잘 된 일이야. 이제 그 칼은 네 놈의 욕망대로만 움직일 테니깐. 역시 넌 보통 놈이 아니었어. 여기 선계의 대장간에서 썩기는 아까운 놈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나?"

 비도의 눈이 무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란 눈동자 가운데 붉은 줄이 세로로 한 줄 나 있었다. 사악한 뱀의 눈, 하지만 무길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비도가 제법인 걸 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선 선인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정령이지만, 인간 세상에 가면 넌 왕이 될 수 있다."

 "왕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어리석기는……. 선인들이 왜 쇠의 비밀을 지키려고 안달을 하는 줄 알아? 인간 세상에선 쇠의 비밀을 가진 자가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야. 쇠는 힘을 주지. 너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비도의 목소리는 은밀하고 달콤했다. 그 어떤 말도 이처럼 무길의 가슴을 뛰게 하지 못했다. 


 '쇠의 비밀을 가진 자가 왕이 된다.'

 그동안 무길은 솥을 만들고, 쟁기를 만들고, 방패를 만들고, 칼을 만들었다. 불똥이 튀고 불에 데어가면서 만든 쇠붙이들은 그대로 선인들에게 전해졌다. 그것이 대장장이의 소임이라고 여겼다. 

 무길은 두 손을 들어 다시 칼을 바라보았다. 하얀 달빛처럼 빛나는 칼은 강했다. 쉽게 구부러지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을 터였다. 난생처음으로 가져보는 쇠는 무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무길은 자신이 늘 쇠를 갈망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길이 물었다. 

 "왜 날 도와주는 거지?"

 비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클클클. 그림자 비도는 누구를 돕는, 그런 짓은 하지 않지. 그저 지긋지긋한 이 선계를 벗어나기 위해 네 놈을 이용하는 것뿐이야."


 형체도 없이 그림자로 살아가는 삶. 선계에서 살아온 500여 년 동안 비도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는 다섯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했다. 선인들은 비도를 보고도 못 본채 했고, 한없이 가벼운 정령들은 비도가 곁에 머물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리석은 정령들은 비도의 모습을 보지도 못하면서 온갖 추악한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비도는 끝없이 인간이 세상을 꿈꿨다. 인간의 세상에 가면 그림자 비도도 형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출발해 볼까?"

 비도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무길은 비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비도와 무길은 가파른 골짜기를 지나 너른 평지로 나왔다. 비도의 걸음이 너무 빨라서 무길은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한참을 걷자 좁은 계단이 나타났다. 길게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자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호수라는 편이 더 어울렸다.

 "이런 곳에 강이 있었다니……."

 무길은 헐레벌떡 다가가 목을 축이려다 깜짝 놀랐다. 썩은 나무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강물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자세히 보니 강가의 돌까지도 시커멓게 죽어있었다. 무길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 북쪽 강이지."

 비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무길의 가슴에서는 '쿵'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무길은 떠돌이 정령이었을 때, 북쪽 강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선계의 끄트머리. 선계에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어둠의 기운들이 북쪽 강에 모여 있다고 했다. 움푹 파인 곳마다 썩은 물이 고여 있었다. 속이 뒤집히는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웅덩이를 피하려다가 무길은 그만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 비도가 속삭이듯 말했다. 

 "조심하라고. 우린 아주 중요한 것을 찾으러 왔으니깐." 

 무길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찾는다는 거지? 북쪽 강에 빠지면 몸이 다 녹는다며?"

 "그건 겁쟁이 선인들이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말이지. 아무도 여기에 그 물건이 있는 줄은 꿈도 못 꿀 테니깐. 상제가 예전에 아주 귀한 물건을 숨겨뒀거든."

 "귀한 물건? 그게 뭔데?"

 "우릴 태우고 이 선계를 빠져나갈 물건이지. 가만있어봐, 여기쯤인 것 같은데."


 비도는 강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멈춰 섰다. 뱀 같은 눈동자에 불을 켠 것처럼 빛이 들어왔다. 비도가 두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무길은 섬뜩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무엇엔가 홀린 기분이 들었다. 

 잔잔하던 북쪽 강에 물결이 일었다. 비도가 점점 더 크게 주문을 외우자 그 물결이 용트림을 하듯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마침내 강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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