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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 Jan 16. 2024

가슴뛰는 한 마디

여긴 아부다비, 저스트 두 잇 정신으로!

아침에 큰 애가 하는 말, "엄마 저스트 두 잇!"
요 며칠 훅 가라앉아 있던 내 마음이 순간 일렁였다.
"뭐? 저스트 두잇?"  "응, 엄마, 그냥 해."
"뭘?" 내가 다시 묻자 딸은 "엄마. 뭐든, 그냥 해."
그래, 조금 선선해지는 것 같으니, 그냥 자전거를 타고 나가보자.
아이들 등교 후, 우리 동네를 잠시 둘러봐야겠다 싶어 오랜만에 운동화도 신고 모자도 챙겨 쓰고 그렇게 집을 나섰다.
아침 8시 20분, 기온은 30도를 조금 넘었지만, 바람이 불어 자전거를 탈 만 했다. 음악을 켜려고 어플을 작동하는데, 영화 '알라딘'의 '아라비안나이트'가 나왔다.  큰 딸의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된 건 우연일까? 사막지역에서 아라비안나이트를 듣게 될 줄이야.


  정말 오랜만에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나는 조금 흥분했다. 길도 모르면서 '구글맵을 믿고 가보자.' 하며 나는 그렇게 우리 동네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강을 돌다가, 큰 도로를 만나고, 횡단보도를 건너, 또 다리를 건너고...
콧노래를 부르며 아부다비의 모래 바람을 맞으며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허벅지가 조금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그늘에 자전거를 세우고 물과 바나나 반쪽을 먹었다.  뜨끈한 바람을 맞으며 앉아 쉬다 또 달렸다.  '여기가 어디지? 왜 점점 덥지?' 하며 달리기를 한 시간여.  9월이면 한국은 가을이 오기 시작한다지만 여기는 사막지역인데.. 갈수록 기온이 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전거를 타고 계속 달렸으니 온몸이 데워지기도 했다.
내 휴대폰은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아, 그냥 돌아갈까? 아니야. 이왕 나왔으니 조금만 더 돌아보자.' 그런데 달릴수록 집과는 더 멀어지고,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휴대폰이 있으니까.' 하며 달리다가 멈춰 구글맵을 켜는데... 으잉? 휴대폰이 멈췄다. '아.. 아이폰은 고열에 민감했었지...' 예전에 찜질방에서 한번 휴대폰이 작동되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
순간 멍 해지는 머리.. '나 너무 멀리 왔는데.. 이제 어쩌지?  조금만 더 가보자. 아니 돌아가보자.'  또 달렸다. 그런데 돌아가고 있는 건지 다른 곳인지도 모르겠다 싶은 순간. 내 앞에는 조금씩 모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여기 사막인가.  공사장도 보이고..'
가지고 온 물은 다마신지 오래. 목은 마르고 다리가 점점 아파왔다.
길이 하나 보이는데 공사 중이어서 막힌 길이었다. 벌겋게 익은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 공사현장이 보였다.  '길을 잃었다고 말할까? 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줄까? 아 모르겠다. 그냥 가보자.'
"익스큐즈미, 아임 로스트."하고 말했다. 나를 보고 씩 웃는 검은 피부의 아저씨. 알아듣지 못할 영어 발음으로 "너 어디 살아? 돌아가야 해. 저쪽으로 둘러서 가."라고 말하는 아저씨.  나는 알았다고 하고 일단 자전거를 돌려 아저씨가 가르쳐 준 대로 다시 길을 나섰다.


모래도 뜨겁고 태양도 뜨겁다. 달릴 수 없어 함께 걷는다. 자전거와.


  사막 한가운데서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 나를 보고 "이 바보야, 여기는 아랍에미리트야. 네가 아직 뭘 모르는구나." 하며 놀리는 것 같았다.
"울고 싶다 정말.  난 맨날 왜 이렇게 사고를 치는 거야."
스스로를 원망했다, 또 '내가 이 나라에 와서 이게 뭐야.' 하며 투덜대다가.. 문득 지난주에 읽은 성경의 출애굽기 생각이 스쳤다. '와. 내가 정말 성경에 이스라엘 백성 같은 꼴이구나. 극한의 상황에서는 감사보다 불평이 나오는구나.'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모래 위를 걷고 또 걸었다.
 또 휴대폰 없이는 못 사는 시대를 생각했다. 편리에 젖어살지만 정작 이런 극한 상황에 휴대폰이 먹통인 건, 정말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다시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와, 나 이제 집에 갈 수 있는 거야?' 다시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는 나무그늘을 찾아 잠시 앉았다. 휴대폰을 식혀야지.. 그늘에 앉기도 전에 신발을 벗어던졌다. 이미 땀으로 다 젖은 몸, 신발도 질퍽해서 자전거 손잡이에 한쪽씩 걸어두고는 나무 밑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나 죽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목이 너무 마른데 가게는 없고..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려나 하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예쁜 원피스를 살랑거리며 나를 흘끔 쳐다보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좀 부끄럽지만 물 좀 달라고 해볼까? 아, 아니야. 참자.'  그러다 그냥 말했다."Excuse me, can I have some water?" 내 몰골이 웃기는지 그 아가씨는 '풉'하고 웃으며 손에 든 물을 흔쾌히 내어 주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나.
그렇게 꿀맛 같은 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일어섰는데 바닥에 사과모양 엉덩이자국이 찍혀있는 걸 보고는 나도 '풉'하고 웃고 말았다.

뜨끈하긴 해도 바람이 불어주어 간간히 몸의 열기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기분이었다. 바람과 물이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길가는 사람이 건네준 물 한 통, 뜨끈한 바람.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발에 땀이 차서 신발을 벗고 자연스레  맨발로 페달을 밟았다. 얼마만의 맨발인가. 머리를 감싸고 있던 모자도 벗어버렸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물에서 방금 건져낸 미역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시내가 가까워지자 마음이 놓였다.

도시로 들어와 한 숨 돌리고, 상가 창가에 비치는 자전거와 나.



주스 가게에 잠깐 내려 패션 푸릇 주스를 시켰다. 종업원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 보았다. 나는 맨발이었고, 머리는 미역줄기 같고, 등과 엉덩이는 누웠다 일어난 흔적으로 땀과 모래가 가득 묻은 채 주스가게에 들어간 것이다.  팔다리는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주스를 한 번에 원샷할 생각으로 주스를 만들고 있는 종업원의 손만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More ice, more! more"을 외쳤다.
땀에 젖은 엉덩이로 주스가게에 앉을 수 없어 가게 문 앞에 나와 털썩 앉아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고 맛있는 주스를 들이켰다.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었다.
내 옆에 한 털보 아저씨가 나를 쳐다보며 씩 하고 웃는다. 그러고 보면 오늘 만난 사람들은 모두 미소를 띠고 나를 봐주었다.  나는 이렇게나 힘든데..  그래도 웃어주니 좋네뭐!
간신히 구글맵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었는데 내 팔은 두 색으로 나뉘어 있었다. 발등도 까매져 있었다.
집을 떠난 지 네시간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글을 쓰며 '내가 꿈을 꾼 건가?'싶다.

꿈이 아니라고 아픈 두 다리가 말 해준다.

씻고 나오니 학교에서 돌아온 큰 딸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오 필승 코리아."  
"너 뭐야? 아침엔 저스트 두잇이라더니"
"응. 저스트 두잇. 그런데 있잖아 엄마, 더 파이팅 넘치는 노래가 생각났어. 오 필승코리아. 오오오오 필승코리아. 이 노래 알아?"

'딸아, 이 엄마 오늘 너의 그 '저스트 두잇' 한마디 때문에 길을 나섰다가 사막에서 그 고생을 했는데, 이번엔 필승코리아라고?' 그 노래는 그만 넣어둬라.  이 엄마 또 가슴 뛸라.
그 엄마의 그 딸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의미 있는 누군가의 한마디는 늘 나를 가슴 뛰게 했었지.  그래, 아부다비에서는 '저스트 두잇 정신'으로 살자. 낯선 땅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마음으로 지내던 때에 딸이 던진 한마디는 마치 이정표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오늘 내게 웃어준 사람들처럼 미소를 띠면서 그렇게

‘Just do it.'

길을 잃었다 싶을 땐, 그냥 걷자. 그 곳부터 길이 시작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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