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은 잠들지 않는다

by 비바리우다

내가 <인생을 다시 설계하는 무의식의 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를 읽던 날, 자다가 번뜩 나도 모르게 눈을 뜨며 든 생각은 남미 여행이었다. 그것은 페루, 사랑의 공원에서 껴안고 입을 맞추는 두 연인을 보며 미소 짓다가 남편과 함께 석양이 지기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던 회상이 아니었다.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내려오다, 난생처음으로 본 오아시스, 와카치나의 평화로운 풍경도 아니었다. 공중에 지어진 고대도시 마추픽추에 대한 경탄도, 드넓고도 환상적인 하얀 소금밭을 짚차를 타고 한없이 달리던 우유니의 그 신비함도, 모레노 빙하에서 나를 빨아들일 것 같은 푸른 빛 구멍을 응시하던 때의 신기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차별을 받은 데 대한 억울함과 수치심의 기억이었다.


처음에 차별을 받았던 사람은 우리 부부가 아니었다. 70대인 남성이 코피를 쏟으며 고산증에 힘들어했을 때, 전염병을 걱정하던 룸메이트가 같이 못 다니겠다고 하면서 그는 혼자가 되었다. 그러자 알루(여행가이드)는 그를 대신 혼자 감당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못 하는데 어떻게 감리사 일은 했냐?’는 식으로 타박하며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남미에도 무지한 데다 영어를 못했기에 어디 혼자 다닐 수가 없어서 그런 처우에도 따라다닐 도리밖에 없었다. 나 또한 남미에 무지한지라 그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못 들은 척 못 본 척했다. 70대인 그는 평생소원이라던 마추픽추를 구경한 다음 날, 돈 천만원짜리, 20여일이 넘게 남은 여행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룸메이트였던 40대 남성도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끝으로 여행을 관두고 돌아갔는데, 그 까닭이 그녀의 차별 때문이라며 그래서 법적 소송을 제기하려 한다는 얘기를, 일행을 통해 들었다.


우리 부부가 받은 차별은 숙소였다. 우리는 가는 데마다 문간방에서 자거나 아니면 계단만 있는 호텔의 경우 가장 높은 층을 배정받았다. 처음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그려려니 했다. 그런데 한국인 사장이 경영하는 엘 칼라파테의 호텔에서 문제가 터졌다. 알루가 흥정해서 우리 일행 중 4팀만 방을 업그레이드 시켜줬던 것이다. 하나는 목소리 큰 남성 4인조, 다른 하나는 자기가 들어있는 여성팀, 다른 둘은 자기에게 먹을 것을 잘 대접하는 부부 2팀이었다.


부부는 총 4팀이었는데, 우리 말고 다른 팀은 항의해서 방을 바꿔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도 남편도 참았다. 그런데 방에 들어가 보니, 목욕탕 물이 잘 안 나오고 아래층 소음도 심했다. 결국 이튿날, 우리도 말해서 방을 교체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입구 쪽 방만을 배정받아서 남편이 또 항의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럴 때도 나는 마치 여자란 모름지기 조용히 있어야 착하고 현숙한 아내인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목소리 큰 아내와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남편에 대한 나의 알량한 배려(?)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썼던 가면이 손해로 다가오면서 후회가 같이 밀려오는 것인지도.


게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기상이변이 생겨 비행기가 결항되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우수아이아에 하루 더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뒷 날 아침 7시에 공항으로 나와달라는 알루의 문자를 받고 공항으로 갔을 때는 이미 4팀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고 없었다. 중간에 합류한 여성 한 팀과 부부 3팀이 먼저 떠난 것이다.


그래도 비행기 좌석은 변경되어 있다고 했으니 그날 안으로 갈 수 있겠지 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짐 붙이는 카운터 앞에서 두 번이나 퇴짜를 맞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여행사의 누군가가 우리 부부의 비행기 예약을 취소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머지 부부팀은 먼저 떠나고 결국 우리 부부팀과 다른 10명의 사람들은 거기서 늦어진 까닭에 이과수 폭포도 못 보고 돌아오게 되었다.

남미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같은 팀 사람들은 억울한 일행 가운데 증거가 뚜렷한 우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남편은 먼저 소비자원에 신고했고, 거기에서 <인도로> 여행사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문제를 제기해 줬다. 그러나 여행사는 자기들은 최선을 다했을 뿐 기상이변이라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남은 것은 법에 제소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니라 30만원 이상의 돈을 들여야 했다. 나는 계속 제소해서 끝을 보고 싶었으나 남편은 기상이변이 없던 것도 아니고 정말 <인도로> 여행사 측에서 취소했는지, 영어로 된 로그 기록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니,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이 2년 전 일이다. ‘남과 싸우기 싫어하고 웬만하면 참아주는 게 좋은 거다’라는 남편의 태도를 그냥 받아들이고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 잠자다가 한밤중에 기분 나쁜 남미의 기억이 느닷없이 올라온 까닭이 무엇일까?


<인도로> 여행사가 무 보상으로 배짱을 부린데 대한 복수심이 웅크리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나 보다. 무엇보다 알루라는 가이드가 했던 차별에 관하여 ‘왜 처음부터 당당하게 따지지 못했을까?’ 하는 수치심이 무의식 저편에 가라앉았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심연을 뚫고 욱하고 떠올랐던 게 아닐까?


여전히 알루가 밉다. 분명 나는 기도할 때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빌었건만 잊히기는커녕 용서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의식 저 너머에서 복합적으로 웅크린 채로, 심층 어딘 가를 휘돌다 아무런 긴장과 준비가 없는 밤중에 그렇게 드러났던 게 아닐까? 남편도 나도 얼마나 보고 싶어하던 이과수였는데......


그러니, 이런 마당에 의식으로 소환해 선명하게 드러내어 살풀이하듯 읊는다. 헝크러진 감정을 적어내며 혼자 푸닥거릴 하는 것이다. 이만큼 했으면 잘 타올라 재가 되겠지. 그리고 바람에 흩어져 사라지겠지. 훅하고 내미는 내 숨소리는 어느 때보다 크다. 의식으로 불러내어 씻김굿을 했으니, 이제는 그것이 잘 잠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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