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재 Aug 29. 2022

장애가 발생했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Y/N)

1년 차 시각장애인의 사회 적응기

스타가르트병의 특성상, 발병 직후 급격히 시력이 나빠졌다가 점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악화세가 둔화되었다. 그리하여 2011년 11월 병을 진단받고 나서 2013년 1월 전역할 때까지 악화된 눈은 전역 직후 시각장애 5급 판정을 받게 됐다.


군대 안에서 1년 2개월 동안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사전 적응 단계를 거칠 수 있었다. 이 시간이 적응에 도움이 되었는지 방해가 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만 병을 발견하고 나서 사회로 나가기 전, 장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는 점에는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여하튼 사회로 복귀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전역 후 계획을 몇 가지 짰다.


계획 1.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점자를 배운다.


우선 첫 번째 계획에 대해서는, 당시 나는 내 병이 진행성이기 때문에 얼마나 악화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었다. 병원에서는 '아마도 그건' 실명까지는 안 갈 거라고 말했지만, 눈앞 5cm 이내에 있는 것까지만 보이는 것도 실명은 아니니, 그런 상태까지 가게 될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그리고 우연히도 당시 집 근처 도보 10분 거리에 시각장애인 복지관이 있었다(무려 복세권이었던 것이다). 지나가면서 언뜻 봤던 복지관 간판이 기억이 났다. 저기 가면 점자를 가르쳐 주겠지? 유사시에 내가 미리 점자를 배워 두면 언젠가 그걸 써먹을 날이 오겠지? 그런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런 생각으로 전역 후 바로 복지관을 찾아가 상담을 하고, 자원봉사자 선생님이 운영하는 주 2회 점자교실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무려 최연소(!)에 최고 시력(!)이었던 나는 빠른 속도로 점자를 습득했다. 처음엔 손의 감각으로 미세한 점의 위치와 간격을 가늠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주었다. 


점 6개로 모든 한글을 표기할 수 있고, 약자와 약어도 있다. 하지만 읽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림...


그리고 내가 점자교실에서 얻은 것은 단지 점자 실력만이 아니었다. 대학 생활에서 배우는 것이 전공지식뿐만은 아니듯이, 그곳에서는 선생님과 다른 학생들(대부분 부모님 뻘)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다양한 유형의 학생들을 가르쳐오셨기 때문에, 선생님 본인을 포함한 다양한 중도실명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건, 40대에 갑작스러운 실명 후 점자교실에 다녔다는 아저씨의 이야기였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그분은 자신의 장애를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다고 한다.


물론 모든 중도 시각장애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의 범주에서 자신이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런 결정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장애인도 사람이다. 단지 장애가 있을 뿐. 그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든 나는 군대 안에서 서서히 눈이 나빠지면서, 자잘한 어려움부터 큰 어려움까지 서서히 겪어 왔고 점자교실에서 선생님과 동료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의 장애를 어느 정도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꼭 점자를 배우는 곳이 아니더라도 시각장애인 복지관이나 맹학교, 다양한 기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등에서 나와 비슷하면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시 자신의 장애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서, 나와 그들은 다르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중도 시각장애인이 있다면 나는 그 생각을 깨는 것이 장애를 받아들이고 사회로 녹아들어 가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계획 2. 휴학을 하고 전공을 바꾼다.


나는 이과였고, 공대생이었다. 딱히 가고 싶은 과가 있던 건 아니라 고3 때 수시/정시 준비를 하며 대학 학과명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전공을 골랐다. 정확히 말하면 마음에 들지 않는 전공을 소거하고 남는 것을 선택했다. 과정은 대략 이랬다.


자연계열 -> 뭔가 이론적인 것만 배울 것 같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것 같다. (X)

컴퓨터공학과 -> 나는 컴퓨터 잘 못 다룬다. (X)

기계공학과 -> 난 기계도 잘 못 다룬다. (X)

생명공학과 -> 난 원래 생물보다는 물리 좋아한다. (X)

그 외의 기타 등등 -> 난 못 해, 난 안 좋아해! (X)


결국 선태한 건 신소재공학과였다(이름이 멋있었다). 그렇게 신소재공학과 학생으로 2년을 공부했지만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고 막 싫은 것도 아니었다. 신소재공학과는 당시 졸업하면 삼성, LG, 현대 등등 대기업과 중견기업에서 일할 수 있었고 내가 생각했던 '평범한 인생'을 할기에 적합한 전공이었다. 그래서 나는 졸업하면 연구원이나 회사원으로 일하겠거니 하고 막연히 장래를 설계했었다. 그 상태로 군대에서 눈이 나빠진 나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21살이 되어서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내 진로 고민과 맞닿았던 부분은 '눈'의 문제였다. 내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 현재의 과를 졸업해서 연구원이나 회사원의 직업을 택하는 것이 괜찮은 선택일까? 그때의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현재 나의 직업이 도서관 사서 역시 눈을 많이 쓰는 직업이기에 이 자문자답은 별 의미가 없는 우문우답이었다. 하지만 이때는 내가 과를 바꿔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문답이었다.


사실 당시 눈이 나빠지면서 내 안에서는 또 다른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에라이, 이렇게 된 이상 나 하고 싶은 거나 하면서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뇌 속에 팽배했던 것이다. 그 생각은 '그런데 내가 뭘 좋아하더라?'와 같은 자유학기제 중학생들이나 할 법한 질문을 스스로 하게 만들었고 오랜 시간(한 3일?) 끝에 답을 얻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때 보람을 느꼈고, 그런 일을 하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다.


이런 사고의 흐름 저변에 깔려있는 내 무의식에는 청소년기에 읽었던  '창가의 토토'라는 책이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책은 문제아로만 보였던 토토라는 아이가, 학생들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도모에 학원'이라는 학교로 전학 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일본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이자 소설이다. 나는 토토를 비롯한 다양한 아이들을 존중하고 성장하게 도와주는 고바야시 선생님을 비롯한 도모에 학원의 모습을 동경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읽었던 책이 인생의 전환점에서 도움을 주었다.

그 독서 경험은 내가 정말 힘들 때, 인생의 전환점에서 방향을 잡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고바야시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고, 도모에 학원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직업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나는 전과(소속 변경)를 결심했다. 하지만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는 '국어교육학과', '영어교육학과'와 같은 사범대학 전공이 없었다. 그냥 '교육학과'는 있었는데, 국어 교원자격증을 얻으려면 '교육학과'와 '국어국문학과'와 같이 두 개의 과를 모두 처음부터 다시 다녀야 한다는(4+4=8년?) 엄청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육학과는 전과 TO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플랜b(플랜 B의 또 다른 ver.)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과 '문헌정보학과'라는 전공이었다. 도모에 학원에는 폐기된 열차를 재활용한 낭만적인 모습의 학교도서관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동아리 선배를 통해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면 도서관 사서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헌정보학과는 전과 TO가 있었다. 운명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월하게 문헌정보학과로 과를 옮겼고(비인기 학과였다) 졸업 후 도서관 사서가 되었다.


아주 가끔 평행우주를 사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눈이 나빠지지 않고 신소재공학과를 졸업하여 대기업에서 일하며 살고 있는 나를. 과연 그 친구가 더 행복할지, 이곳의 내가 더 행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전과는 다른 삶이지만, 전과는 정말 하길 잘했다.


계획 3. 아르바이트를 구해 돈을 번다.


마지막 계획은 눈이 나빠지지 않았어도 군대 전역 후에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대학교를 2년 동안 다니면서 과외나 아르바이트 한 번 안 했던 나는 기특하게도 전역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물론 부모님께 원래 받던 용돈은 그대로 받고... 벌어서 더 쓰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또한 처음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온라인 구인구직 사이트에 카페 구인 공고문이 올라왔을 때에도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용기 내어 카페에 연락을 해 보았지만 "눈이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럼 쟁반과 그릇을 들고 2층을 오르내릴 수 있으신가요?"와 같은 사장님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안 해봤으니까. 못 하는데 할 수 있다고 했다가 망신당할까 봐.


그렇게 좌절될 뻔한 인생 첫 아르바이트 구직 계획은, 동아리에 있던 친구의 부모님께서 파리바게트와 할리스커피를 운영하시는 큰 손(!)이라는 사실로 인해 지인 찬스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처음에는 파리바게트에 갔다. 4시간가량을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을 보고 배우며 '이 일을 정말 할 수 있겠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이 일은 내가 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파리바게트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어렴풋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 이날의 경험은, 빵을 보기만 해도 빵의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점과(계산을 하려면 빵 이름을 알아야 했다) 수십여 개가 넘는 빵의 종류가 매 시즌 바뀐다는 점이 나를 파리바게트 아르바이트생 자격 획득을 방해했다. 빵도 그렇고 가격표도 그렇고 뭐가 보여야 구분을 하고 계산을 할 텐데, 이 일은 나에게 무척 어려웠다. 결국 솔직하게 못하겠다고 사장님(친구 어머님)께 말씀드린 나는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지만, 당시 위축되어있던 나에게 이런 종류의 좌절은 나를 키우기는커녕 더 작게 만들어 집구석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친구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또 다른 매장인 할리스커피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 아르바이트 경력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다행히 카페에서의 일은 빵집에 비해 눈을 덜 써도 되었다. 포스기의 메뉴는 비교적 단순했고, 음료의 레시피 또한 시럽 몇 펌프, 가루 몇 스푼으로 계량했기에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위해 어렵게 컵에 물을 받던 내게 사장님께서 '물이 컵에 담기는 소리를 들으면 보지 않아도 양을 가늠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몇 개월 정도 지나자 소리만 들어도 물의 양을 가늠할 수 있었다. 노력하다 보면 도와주는 사람도 생긴다. 나는 카페에서 일을 하며 그런 것들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사회로 복귀한 나는 그렇게 일보 후퇴 후 이보 전진을 반복하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비장애인일 때와는 다른 경험이었지만, 새롭고 기대되는 방향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애에 서툰 복학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