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 KTX의 맨 앞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새벽의 공기가 흐릿하게 유리창을 스친다. 따뜻한 호밀빵 한 조각과 케모마일 향이 진한 차 한 모금. 몸을 감싸는 따스한 기운이 기분 좋게 전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2020년 CEO 모임에서 만난 동기들과 부산에서 골프를 치는 날이다. 설레는 마음에 새벽부터 서둘러 길을 나섰다.
과거의 나는 과음에도 불구하고 늘 일정한 몸무게를 유지했다. 하지만 갑자기 공황장애와 갱년기가 찾아오면서 몸이 무겁게 변했다. 거기에 우울감까지 밀려왔다. 나의 인간관계는 IT 업계 사람들과의 만남이 90% 이상을 차지했다. 일에 대한 열정 하나로 쉼 없이 달려왔던 나는, 어느 순간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지쳐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만남과 자극을 원했고, 그렇게 CEO 모임에 발을 들였다.
사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도 인문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대학원 진학을 고려했지만, 시간과 부족한 나의 지적 능력에 대한 부담이 컸다. 결국 네트워크 형성과 동시에 적은 지적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CEO 과정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모임의 시작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3교시가 시작되었다. 그건 바로 술자리였다. 한국 사회에서 술 없는 모임이 어색한 것처럼, 이곳에서도 술은 사람을 엮어주는 강력한 매개체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술을 좋아했고, 또 꽤 잘 마시는 체질이었다. 20여 년간 영업 일선에서 단련된 말투와 행동, 그리고 공감력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어느새 모임의 인기녀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코로나 팬데믹. 전 세계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사람들은 강제로 격리되었다. CEO 모임도 불과 두 달 만에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고, 3교시 단합 모임 역시 사라졌다. 대면 만남이 금지되면서 모든 관계는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갑작스럽게 단절된 세상에서 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어색하기만 했다. 가족과 함께 있어도 마음이 불편했고, 일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혼자’라는 감각을 또렷이 마주했다.
그때부터 걷기, 달리기, 독서를 시작했다. 일에 대한 열정을 나를 위한 시간으로 돌리면서, 조금씩 균형을 찾아갔다.
팬데믹 이후, CEO 모임은 이전만큼 활발하지 않았지만, 삼삼오오 만남을 유지하며 정을 쌓았다. 이 모임에는 법조계, 군 장성, 대기업 대표, 사업가 등 각계각층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중소기업 임원인 나는 그들 사이에서 다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친화력과 삶의 강인함은 그들에게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정 인물들이 회장과 사무총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강한 집착을 보였고, 이들의 독선적인 운영 방식은 점차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일부 회원들이 새로운 모임을 만들어 따로 관계를 유지했지만, 하지만 우리는 전체 총동문이라는 원래의 소속감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소모임 사람들과 고민 끝에 기존 기수 모임을 다시 정립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사무총장이 되었다.
사실 올해는 나를 찾는 시간을 더 갖고 싶었다. 사람 만남을 줄이고,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모임의 재정비를 위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써니 전무가 사무총장을 맡으면 내가 회장을 하겠습니다.”
모임의 여러 후보들이 같은 의견을 냈다. 그들의 눈에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결국 동의했고, 이후 기존 멤버들에게 연락하며 새로운 기틀을 다지고 있다.
오늘이 사무총장이 된 후 첫 공식 행사다. 회사에서는 모든 기획을 직원들이 도와줬지만, 세부적인 것까지 챙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 역시 나를 성장시키는 계기로 받아들였다. 단톡방에서 실수도 많았지만, 사람들은 너그럽게 웃으며 나를 응원해줬다.
이번 1박 2일의 부산 행사는 골프가 중심이지만, 골프를 치지 않는 회원들도 저녁 행사에 참석하도록 독려했다. 몇 년 만에 많은 동기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과 새로운 시작을 잘 이끌고 싶다.
나는 이 모임에서 막내다. 가끔 술자리에서 했던 말이 있다.
“태어남에는 순서가 있지만, 떠나는 날은 순서가 없습니다. 저의 생애 중 한 조각을 대표님들과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창밖을 바라보니 아산을 지나 푸른 안개 속으로 기차가 달려간다. 부산까지는 1시간 30분 남았다. 모든 여정에는 도착지점이 있고, 모든 인연에는 끝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길을 어떻게 가느냐이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온전히 즐기며 오늘도 나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