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고 가야 재미있는 몽골여행
박자씨는 매일 8명의 식사를 준비했다. 오늘의 저녁메뉴는 박자씨가 사막에서부터 이고 지고 온 양고기였다. 박자씨가 가게에서 아이스박스가 아닌 종이 박스에 고기를 담아 사 왔다. 푸르공 짐칸에서 흔들리는 생고기를 흘끗이며 언제 먹나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박자씨가 요리하는 게르에 가서 냄새를 맡고 돌아오곤 했는데, 냄새로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 양고기인 것을 알아챈 정찰병이 나지막이 소문을 퍼트렸다.
“오늘 저녁도 양고기다.”
고비 사막을 지나면서는 양고기가 식탁에 계속 올랐다. 양념에 절인 양고기와 감자, 당근이 함께 나온 허르헉을 먹기도 하고 어쩌면 퓨전음식일지도 모른다며 양고기가 작게 썰린 고추장 볶음밥을 먹기도 했다. 퐁퐁과 개수대가 없는 여행지에서 식기구는 약간의 물과 물티슈로 닦여져 왔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컵에서도 포크에서도 양고기 냄새가 났다. 양고기 기름이 묻은 컵으로 커피를 마신 어느 날의 아침에는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도 양고기라니..!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커다란 양 갈빗대를 멀뚱히 바라봤다.
박자씨가 고생해서 요리한 양고기를 선뜻 먼저 먹는 사람이 없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철이가 “잘 먹겠습니다!”하고는 수저를 들었다. 머뭇대던 동생들도 따라 고기를 집어 들었다. 고기 한 점을 씹어먹어 보니 나름 괜찮았다. 입맛이 별로 없어 간식도 마다하던 일행들이 천천히 한 접시를 비워냈다. 그렇게 먹기 시작한 것이 두 접시가 되고.. 세 접시가 되었다. 결국 ‘이것은 최고의 안주!’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푸르공 짐칸을 뒤져 맥주와 보드카를 꺼내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 것이 술꾼의 도리라고 했던가. 술을 마신다는 소문에 애주가들이 강가로 모여들었다. 몽골은 보드카가 유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첫날 도시의 마트에서 기대하며 샀던 ‘노매드’와 ‘칭기즈’를 털어 마셨다. 흐르는 강물 소리에 한 잔, 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한 잔. 해가 다 넘어갔을 때엔 비좁은 벤치에 4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휴대폰 불빛으로 술자리를 밝히고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보드카는 소주와는 다르게 취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몽골 인기 음료 ‘꼬이’와 섞어마시니 달달하니 맛이 좋았다. 보드카 두 병을 비우고도 우린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미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고 나는 캠프사이트 옆 동네에서 열리는 클럽에 가겠다고 춤을 췄다. 문제가 많은 술쟁이들이었다. 강변의 게르에서 외국인 숙박객이 나와 “Could you please…”라고 무언가 말했고 더 말하지 않아도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의 술자리는 한국에서만 용인된다는 당연한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미안해진 우리는 사과하고 즉시 술자리를 마쳤다.
음식과 술을 정리하고 별을 보고 싶은 사람들만 남았다. 은하수를 좋아하는 철이와 태태 그리고 나. 세 명이 벤치 세 개를 골라 각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시각은 밤 10시. 달이 꼭대기에서 태양처럼 밤을 밝혔다. 보름달이 너무 밝아 별은 몇 개 보이지 않고 강물에 비친 은색 달빛만 아른거렸다. 머리 뒤에 있던 달이 앞으로 기울어 조금만 더 지나면 산등성이를 넘어갈 것 같았다.
“우리 달이 질 때까지만 기다려보자.
먼저 잠들기 없기!”
새벽 두 시가 되자 달이 산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 달빛이 사라졌다. 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거의 네 시간 동안 별을 기다리다니 진하게 취한 것이 분명했다. 누워서 한참을 별을 봤다. 강물은 세차게 흐르면서 소리를 냈고 동물 우는 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과학시간에 배운 별자리를 몇 개 맞춰보다 이내 포기했다. 그저 천장에 콕콕 박혀 반짝이는 별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공기는 낮보다 더 차졌고 몸이 떨려왔다. 술과 별을 좋아하는 모임은 여기까지. 해산하고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내 침대는 숙소 안쪽 창가에 있었다. 술에 취해 털썩 누웠는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등을 부비니 따뜻해졌다. 큰 창으로 별만 떠있는 하늘이 시야 가득 보였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나만 알고 있는 별들의 모습이라니 벅찼다. 내일이 되어 만날 친구들에게 별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비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국 같은 이곳에서 며칠 더 묵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박자씨는 죽을 끓였다. 몽골인들은 해장으로 죽을 먹기도 한다고 하셨다. 당근과 감자가 들은 맑은 죽이 국그릇에 담겼다. 숙취로 음식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은 미미와 내가 식사 자리에서 몰래 도망쳐 나왔다. 아침에도 여전히 문제가 많은 술쟁이들이었다. 식당에 딸린 가게로 가서 탄산음료를 구매했다. 익숙한 환타 오렌지맛 음료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미미와 함께 마지막으로 마음에 들었던 풍경을 바라보며 음료를 홀짝였다. 미미야. 너와 함께 몽골에 와서 다행이야. 고기와 술과 별 덕분에 생각지 못하게 행복을 느낀 날이었다. 우연히 다가올 하루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는 여행을 하나 보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