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키우면서 응급실행
한 번쯤은 필수 옵션이다.
돌이 안 지난 첫째를 데리고
막 신혼이었던 친언니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언니가 내 몰골이 안 돼 보였는지
(어린 아기 독박육아의 고됨을 정통으로 맞은 얼굴)
본인이 선물 받은 화장품이랑 옷 중
입어보고 맘에 들면 몇 벌 가져가라고 했고
임부복 이후 쇼핑이 전무후무했는데
몇 년 만에 나를 위한 꾸밈에
콧노래를 부르며 작은 방 거울에서
피팅을 하고 있었고
언니와 첫째는 안방에 있었다.
이불장에 관심을 갖기에
이불장 문을 활짝 열어줬고
그때쯤 첫째는 한창 서서 잡기를 시도할 때였다.
이불장 안에 개켜있는 이불을 잡고 일어서
더듬더듬 이불장 문 쪽으로 가다가
이불장 문 경첩에 손을 넣고
다른 손으로 이불장 문을 밀어버린 것이다.
애기의 비명소리에 내 심장은 바닥에 쿵!!
사색이 된 언니와 종이작처럼 납작해진
첫째의 왼쪽 약지 손가락
택시도 안 다니는 구도심에서
난 이미 애를 안고 병원까지 뛰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수도 없이 속으로 외쳤지만
그 먼 병원까지 미친 듯이 달려가는 내내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병원에서도 아직 너무 아기라
엑스레이를 찍어봐도 모른다고
커 가면서 경과를 계속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마음 졸이기를 몇 달
수시로 들여다보고
손가락을 이렇게 움직여보라고
애기한테 확인받기를 수백 번!!
다행히 아무 이상 없이 잘 커주었다.
그러나 열 살인 지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왼쪽 약지 손톱이 다른 손톱 길이에 비해 짧은 게
그날의 사고가 떠올라 볼 때마다 미안함이 생긴다.
내가 좀 더 잘 들여다 보고 신경 쓸걸
기능적인 문제도 없고 시각적인 작은 차이인데
그게 엄마 눈에는 보인다.
정말 사고는 눈 깜짝할 사이라고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앞이 아득하다.
내가 초등학교 전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 이야기다.
그날도 밤늦게 일하고 온 엄마에게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한 손을 뒷 짐 지고
보여주질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억지로 빼서 보니 왼쪽 손목에는
어설프게 두루마리 휴지가 감겨 있었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너무나 놀라 그 길로 나를 데리고
동네 병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다행히 치료는 잘 됐고 대동맥에 가까운 상처라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의사 선생님 설명에 엄마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제야 병원까지 뛰어온
본인의 맨발이 보이셨다고 한다.
아이가 아니라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겠어요.
의사 선생님은 안도감에 우시는 엄마를
다독여 주었다고 한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하다며
얌전하다가도 가끔 그렇게 한 번씩
엄마 심장을 들었다 놨다 사고를 친 게 너였다고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신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엔 없지만
아직도 내 왼쪽 손목에는 그날의 상처가 있다.
아마도 놀다가 날카로운 것에 심하게 베었는데
엄마에게 혼날까 봐
임시방편으로 휴지로 돌돌 말았었나 보다.
그때 엄마가 초인적인 힘으로
병원까지 달려가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키보드를 칠 수 있었을까?
아기 낳기 전엔 나 혼자 다 큰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아프지 않고 건강한 건
애기시절 아프면 밤을 꼴딱 새워서 간호하고
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이라는 걸 몰랐었다.
지금은 내 딸들을 키우며 알고 있다.
수많은 눈물과 수많은 밤 지새움에
우리가 잘 컸다는 것을.
그 깊은 사랑과 기억을 담아
편지에 적어
첫째 돌잔치 때 들어온
축의금을 모두 모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마움을
편지와 용돈으로
양가 부모님께 돌려 드렸다.
나도 엄마가 되어 엄마의 마음으로
엄마처럼 우리 아이들을 키우겠지
이만큼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