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비투스 VS 계층]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피에르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철학자, 비평가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석학으로 신자유주의를 전면에서 가장 강하게 비판했다.

저서인 《재생산》, 《구별짓기》 등과 '문화 자본', '아비투스', '장(field)' 등의 개념이 유명하다.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를 잇는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로 꼽힌다.

미셸 푸코를 이어 논문 인용률이 2위일 정도로, 사망 이후에도 사회과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900%EF%BC%BFScreenshot%EF%BC%BF20250423%EF%BC%BF164759%EF%BC%BFGoogle.jpg?type=w966 구글 이미지 -피에르 부르디외-


'부르디외'는

<습관화된 문화적 행동>은 먼저 교육 수준에 따른 영향을 받고

다음으로는 출신 계층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그리고 <아비투스habitus>는 개인이 속한 계급이나 계층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행동 양식을 만든다.

[출처] 현대 철학 로드맵 -arte 출판-


라고 말하고 있다.



아비투스habitus



<아비투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 '태도'나 '습관' 등을 의미한다.

개인의 취향은 배경과 환경, 가치관, 분위기, 종교, 사상, 권력이나 계층과 같은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취향이 <아비투스>라고 보면 된다.


<아비투스>는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고 짧게는 20~30년,

길게는 수세대간 내려온 경험과 문화가 축적된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바꾸거나 극복하기는 어렵다.


<아비투스>는 사회적 관습도 포함하는데 이것은 계층마다 다르다.

그래서 똑같은 개인이 상류층에 진입하려고 해도

상류층 출신은 '아비투스'를 공유하고 있어 의사소통이 원활한 반면

하층의 경우 '아비투스'가 달라 의사소통이 어렵고

그로 인해 상류층 진입이 어려워진다.



계층과 아비투스



'경제의 계급'구분이 '문화를 구분'시키고

'문화의 구분'이 다시 '계급구조'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하면

'돈'이 '취향'을 결정짓고

이 '취향'이 '계급'을 결정짓는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대체로 교육 수준과 사회 계급에 부합한다.


첫째는 상류층 취향으로서의 아비투스이다.

고전적인 고급예술에 대한 취향을 말한다.

이러한 취향은 교육 자본이 가장 풍부한 지배집단에서 흔하다.


두 번째의 중류층 취향의 아비투스는

질이 좀 떨어지는 예술작품에 대한 취향으로서 중간계급에 많다.


마지막으로, 대중적 취향의 아비투스는

대중음악이나 경음악 같은 작품을 선호하는 것인데, 노동 계급에 가장 흔하다.


이러한 문화적 취향에 있어서의 '계급 차이'들은

계급 체계를 정당화하고 재생산하게 된다.


피지배자는 자신이 현실을 '오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오인'을 올바른 인식이라고 생각하고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행위함으로써 거기에 공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골프를 치고, 벤츠를 타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값비싼 음식을 먹고,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고급 아파트에서 살고, 소주가 아닌 양주를 마시고 등등을 하면

상류층이라고 여긴다는 말이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지배체계의 표현이

모든 문화적 산물, 의류, 스포츠, 음식, 문화, 예술, 언어처럼

'취향'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이 `취향`이 나의 계급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재래시장을 이용하면 하류층이고

대형마트나 아웃렛을 이용하면 중류층이고

백화점을 이용하면 상류층으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계급 차이'들이 '문화적 차이'들을 만들어 내는데

이러한 문화적 차이들은 계급 위치보다는 재능이나 성취 같은 개인적 특성에 따른 것이라고

'잘못 인식'되기 때문에, 결국 계급 체계를 정당화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상류층들은 `구별짓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육 수준이든 재산 수준이든 어떠한 수준에 의해


<아비투스>의 차이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가 계급을 정당화하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


상류층의 아비투스가 반드시 제일의 '선'일 수는 없는 것이고

하류층의 아비투스가 반드시 최고의 '악'일 수는 없는 것처럼


아비투스에 의한 `구별짓기`는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현실은 계층의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아비투스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왜 이렇게 `구별짓기`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예를 들어 고급 레스토랑을 가면 직원들이 인사를 하고 문도 열어주는 등

서비스가 최상이다. 상류층들은 중, 하류층들에게 서비스를 해주고 고개를 숙이고

친절하게 웃으면서 모든 것을 다 받아준다.

그러면서 그들은 중, 하류층들의 주머니에 있는 소중한 돈을 반드시 받아가는 것이다.


이 레스토랑을 벗어나면 상류층들은 벤츠 마이바흐를 타고

아니 이보다 더 고급차를 타고 집으로 갈 것이고

집은 말로 할 수 없는 고급 주택에서 살면서 고급 포도주를 마시고

오늘 하루 수익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문을 열어주고 미소 지어주고 핀잔을 들은

대가代價인 것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중, 하류층들은 어떤가?

이런 서비스를 받으려고 고작 한두 시간 동안 상류층이 되어보려고 한 달 쌀 값을 쓰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행태가 자신의 현실을 `오인`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기성세대만 이러고 멈추면 되는데 우리 어린 자녀들이 보고 배운다는 것이다.

우리 자녀들이 어른이 되어 똑같은 서비스를 받고 한 달 쌀 값을 한두 시간의 서비스에 바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상류층이 된 듯 행동하고 있을 것이다.



상류층 행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계급 구분이라는 것은 아주 잔인한 메커니즘이다.

'졸부'는 아무리 많은 돈을 벌게 된다 하더라도 자손 대대로 물려받은

무산계급의 촌티를 쉽사리 벗어버릴 수 없다.


라고 `움베르토 에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포함한 중, 하류층들의 생각이 상류층들의 지갑을 위해서 길들여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은 고급 레스토랑을 가라` 라든지

`한 번쯤은 나 자신을 위해서 돈을 써라` 라든지


이런 멘트는 누가 하는 것일까? 아마 상류층들이 한 말이 아닐까.

이런 멘트에 자극받아서 좋아할 중, 하류층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사도록 유도하는 `저자`들일까.


정말 혹하는 멘트다.

이 멘트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것이다.

각자의 판단에 따라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진짜 상류층이 되는 것일까.

상류층이 되기 어려운 현실이므로 이 정도는 누리자는 것인가.

오히려 이런 나 자신이 서글프지는 않은가.

저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한 것이다.


말하자면 SNS에 올라온 화려한 옷, 신발, 장신구,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여행 등

이런 것을 보면서 나 자신과 비교하여

SNS를 보지 않았더라면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들을 위해 돈을 써 버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SNS를 보는 바람에 돈을 질러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각자의 `아비투스`대로 스스로 자신에 맞게 잘 판단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정말 쉽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 번씩 저지르는 답답한 나를 보기도 한다.

나 자신도 어느새 길들여진 것이다. 이것을 깨뜨려야 한다.


이렇게 상류층들은 중, 하류층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저들끼리

벌써 `구별짓기`를 해 놓은 것이다.



상류층들이 하고 있는 `구별짓기`의 대안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오히려 '최악'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서양의 상류층들이 문화와 기술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을 식민지화하면서

원주민들의 아비투스는 저급하므로 말살하고

서양의 아비투스가 최고인 듯 자연과 문화를 마음껏 휘저었다.

그 결과 지구는 병들게 되었고 원주민들의 문화는 말살되었다.

어쩌면 치료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류층의 아비투스가 최고의 '선'은 아니다.

그러니 중, 하류층들이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꼭 부러워할 이유는 없다.


상류층들이 계층으로 구별짓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중, 하류층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중, 하류층들이

상류층들의 궤변에 길들여져 있고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들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개발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상류층들의 `구별짓기`는 개인 혼자만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가 없다.

중, 하류층들이 모두 같이 상류층들에게 대응해야만 한다.


혹시라도 이렇게 하면 경제가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지 말기를 바란다.

상류층들은 걱정할 것 없다. 상류층들은 또 다른 플랜 B가 있으니까.


차라리 `우리끼리의 골목경제를 활성화하면 어떨까`라고 한번 제안해 본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튜브를 보더라도 시간을 순삭 시키는 짧고 재미있는 쇼츠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강의하든지 세계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런 유튜브 콘텐츠를 찾아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다가 힘들 때 잠깐 쇼츠를 보고 머리를 식히는 거다.


그리고 일을 하고 와서 힘들겠지만 30분 아니 10페이지 혹은 5페이지 정도를

읽기만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상류층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지 않고 `구별짓기`를 당하지 않게 된다.












keyword
이전 01화[칼럼][인간의 죽음 VS 초인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