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이론이 동양의 '이기론'과 다를 바가 없는 이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태생의 논리학, 수학 철학, 심리 철학, 언어 철학을 다룬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철학자이다.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한다.
저서로 <논리 철학 논고>, <철학적 탐구>, <확실성에 관하여> 등이 있다.
[출처] 위키백과 -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기존의 철학에서 적용하는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출처] 위키백과 -비트겐슈타인-
그러면서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을 제시하는데
`그림 이론`이란
교통사고를 다루는 재판에서 장난감 자동차와
인형 등을 이용한 모형을 통해 사건을 설명했다는 기사를 보고 생각해 낸 것으로
모형이 실제의 자동차와 사람 등에 대응하기 때문에 실제의 사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언어도 이와 같다고 본 것이다.
곧 언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언어가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명제들로 구성되어 있고 세계는 사실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명제들과 사실들이 서로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와 세계의 논리적 구조는 동일하며
언어는 세계를 그림처럼 기술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출처] 인문학 서원 에피쿠로스 -그림 이론-
라는 이론이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그림 이론`은 기존의 철학, 특히 형이상학이나 도덕학에서
신이나 자아, 도덕과 같은 것들은 실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없어서
뜻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자연과학과 같은 것은 실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있다.
[출처] 위키백과 -비트겐슈타인-
라고 말한다.
이러한 논리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출처] 위키백과 -비트겐슈타인-
라고 말한다.
여기까지의 철학적인 이론을 '전기 비트겐슈타인' 이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비트겐슈타인은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고백하며
말할 수 없는 것이 증명할 수 없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구태여 증명하려 하여 무가치하게 만들지 말라.
[출처] 위키백과 -비트겐슈타인-
고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수정하고 있다. 이를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한다.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렇게 한 비트겐슈타인을 철학계에서 비범하게 본 것이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제시하는데
`언어 게임`이란
갑자기 K가 ‘칼’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P가 ‘칼을 달라고?’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P는 ‘무엇이 칼과 같다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또다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P는 ‘칼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칼을 가지고 오면서 P는 상황을 인지하고 ‘칼을 가져와서 사과를 깎으라는 것이지?’라고 묻자
비로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처] 인문학 서원 에피쿠로스 -언어 게임-
칼이라는 한 글자를 가지고 벌어지는 이 상황이 바로 `언어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이미 겪고 있는 `언어 게임`을
학술적으로 정립한 것일 터이다.
정리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세상을 그리는 그림’이므로
세상은 말할 수 있는 `명제들의 총합’이다.
[출처] 인문학 서원 에피쿠로스 -언어 게임-
라고 `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주장하던 것을
언어의 다양성, 복합성, 관계성, 현장성, 보편성, 공공성, 상대성을 강조하면서
언어는 환경, 문맥,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고
사용과 실천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게임이다.
[출처] 인문학 서원 에피쿠로스 -언어 게임-
라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자신의 철학을 수정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20대, 30대에 접했지만 그의 책을 보면 철학이라기보다 국어 문법 같은 느낌을 받아 포기했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라며
철학계에서는 그의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의 책을 직접 보기보다
그의 이론을 설명한 글과 영상을 보면서 정리해 보기로 마음먹고 글을 쓰고 있다.
역시나 모든 글과 영상들은 그의 `그림 이론`과 `언어 게임 이론`에 관한 논지를
단지 요약해서 정리해 주는 것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소쉬르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에서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메시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내가 보기에 물론 수박 겉핥기식이지만 결론만 보았을 때
소쉬르의 `랑그, 파롤, 시니피앙, 시니피에`나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 언어 게임 이론`은
동양 철학의 '이기론理氣論'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이 기존 전통 철학이
`언어의 논리를 잘못 적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발현된 `기`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말하자면
세계가 있는데
곧 '리'가 있는데
그림 이론에 따라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여 드러내려고 하는 어떤 '세계'가 있는데
곧 '리'를 '기'로 드러나게 하는 어떤 '리'가 있는데
언어 게임 이론에 따라 표현되어진 `언어`를 보고 대처하는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즉 드러난 '기'를 `상황`에 따라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로 바꾼다면 '이기론'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결국은
눈에 보이는 꽃을 보고 어떤 언어로 표현할 것이며
그 표현이 `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것이며
그 표현이 `사랑`을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이황, 이이, 기대승이 추구한 '이기론理氣論'으로 생각하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든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가 있을 것이다.
철학과 같은 학문이 우리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철학자들의 이론이 이론 자체에 그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 곧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 편 `[칼럼] 존재 VS 시간' 에서 말한 것처럼
세계가 항상 변증법적으로 변하는 불확실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면
언어가 불완전하여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어느 것이 먼저냐에 따른 논쟁, 곧
`언어의 한계`로 인해 세계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한계가 있기`에 언어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말은 `닭과 알`의 논쟁처럼 아무 의미 없는 논쟁이 될 것이다.
이처럼 철학이라는 학문이 이론적인 논쟁만을 일삼는다면
삶에 주는 영향과 메시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은 소쉬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랑그, 파롤, 시니피앙, 시니피에, 존재자, 존재, 현존재, 그림 이론, 언어 게임 이론 등을
직접 몸소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춘수의 '꽃'이 그 예이다.
여기 있는 한 송이 꽃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꽃
으로 `이미` 상황에 따라 우리들은 해석하고 있으며
표현된 그 언어를 그 순간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이해하면서 상호 교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5년 우리들은 참으로 어려운 난국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의 패권
국제 정세
국내 정세
AI 의 역습
보이스피싱
딥페이크
국제 경제
생활 경제
등등
이 어려움은 어느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런데
'우산 장수와 짚신 장수'이야기처럼
비가 오면 우산 장수는 웃지만
짚신 장수는 울 것이고
비가 오지 않으면 짚신 장수는 웃을 것이고
우산 장수는 울 것이다.
그런데 만일
비가 오면 짚신 장수가 우산 장수를 도와주고
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 장수가 짚신 장수를 도와준다면
그래서 알맞게 분배한다면
모두가 울지 않고 웃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