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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Jun 28. 2024

6. 때로는 도망치는 것이 낫습니다.

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는 것의 해로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먹구름에서 벗어나십시오. 
보름달 같이 따스하게 빛나는 당신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잘랄레딘 모하마드 루미-


초등학교 교사 T는 오늘도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준비합니다. 내가 왜 초등학교 교사를 한다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어김없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초등학교가 이런 곳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습니다. 


T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직장이 안정적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 큰 고민 없이 교대에 진학했습니다. 임용시험도 잘 치렀지요. 그렇게 한 초등학교에 발령받았을 때에도 T는 설레기만 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귀여웠고 선생님들도 친절해 보였지요. 퇴근 시간이 빠른 편이어서 여가를 계획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대를 희망하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지도에 잘 따랐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지요.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고 고집스러운 데다 말도 함부로 하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아이는 뭘 하려는 걸까요


생각해 보면 T가 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런 아이들이 반에 하나 둘 정도는 있었지요. 그때는 그냥 모른 척하거나 거리를 두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선생님이 되고 보니 그럴 수가 없었지요. 그런 아이들을 그냥 두면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난감했습니다. 포용하면서 부드럽게 대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지만, 단호하게 제재하거나 훈육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지요. 


아이들은 그런 T의 성향을 금세 파악하고 점점 더 통제 밖으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안 그러던 아이들마저 규칙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늘었지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 간의 충돌도 늘어났습니다. 가벼운 언쟁에서부터 꽤 심각한 수준의 몸다툼까지 크고 작은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게도 학부모의 항의가 점점 거세어졌지요.  


T는 몰랐습니다. 학부모와의 전화 연락이나 면담이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학부모로부터의 연락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퇴근 시간 따위는 의미가 없었지요. 전화연락과 문자 등으로 쏟아지는 학부모의 항의에 T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학교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후에도 고통은 이어졌지요. 언제 또 학부모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긴장 상태였고, 잠자리에 누우면 다음 날은 또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T의 고통은 계속 누적되었습니다. T의 마음속에서는 어서 빨리 도망치라는 소리가 계속되었지요. 하지만 T는 참고 견뎠습니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지요. 부모님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신 부모님을 말입니다. 교대에 합격했다고 기뻐하시면서 주변 분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부모님, 그분들을 생각해서라도 견뎌야 했습니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에도 그렇게 버텼고, 그 결과 이렇게 번듯한 직장인이 된 것이니까요. 견디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여기며 이를 악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요즘은 자기 자신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무시당할 때, 학부모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 학교 선생님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슬쩍 보고 눈을 돌릴 때, ‘정말이지 난 사람보다 못한 존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사라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고통을 견디는 행동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행동입니다. 적정한 수준까지 고통을 견디는 습관을 개발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적응적이지요.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고통을 견디는 행위가 위험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영국 사우스햄튼 대학의 심리학 교수 토마스 린치(Thomas Lynch)는 고통을 견디는 행동의 역기능적 측면을 연구하기 위해 고통과잉감내(distress overtolerance)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고통과잉감내는 개인의 삶의 질에 해로운 영향이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은 수준의 고통을 견디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심각한 수준의 고통을 견디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해롭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너무 많은 고통을 경험하면 그 상황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도피해야 할 때에도 도피하지 않고 끈질기게 고통을 견딥니다. 이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압력을 받는 것처럼 그 상황에 머물러 있지요. 그 결과는 매우 치명적입니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초등학교 교사 T 또한 그러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진도 고통과잉감내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는 경향성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러한 경향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조사가 되었지요. 조사 결과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이들은 고통스러운 과제를 그만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죄책감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꺼립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손상되는 것보다 과제를 완수하거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이지요. 


둘째, 이들은 고통을 견딜 때 다양한 각성조절 기술을 활용해서 적절히 고통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참고 억제하는 방법을 씁니다. 이들은 주변에 감정을 표현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등의 일반적인 전략도 좀처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참고만 있는 것입니다. 


셋째, 그렇게 강도 높은 고통을 참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부적응적 행동으로 고통을 완화하기도 합니다. 음주나 흡연, 약물 사용, 폭식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빠르게 고통을 줄이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고 단편적이어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나 고통이 누적되고 맙니다.  이처럼 이들이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단순히 억제하거나, 소수의 부적응적 방법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것입니다. 

 

넷째, 이들은 회피행동(미리 피하는 것)이나 도피행동(직면했을 때 도망치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더 자주 고통에 직면하게 되고, 고통스러운 과제도 더 오래 지속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지요.  


다섯째, 어떤 사람들은 유사한 고통에 자주 노출되면서 일종의 둔감화 현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는 유사한 자극이 반복적으로 주어질 때 늘 같은 정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자극에는 상대적으로 덜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지요. 고통을 유발하는 자극에 대해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유사한 고통 자극에 점점 둔감해지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덜 고통스러운 것으로 지각’하기는 하지만 몸의 충격은 그대로인 셈이지요. 본인은 고통을 좀 더 수월하게 견딜 수 있다고 ‘인식’하겠지만 몸은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고통과잉감내 경향을 가진 사람들은 고통감내력 점수가 높은 사람들 중 스트레스나 고통 수준이 높고, 감정이나 각성을 조절하는 능력과 자원이 부족하며, 고통스러운 과제에 대한 압박이 심하고, 고통 회피나 도피에 대한 거부감이 과도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고통감내력 점수가 높기는 하지만, ‘고통을 잘 견디는’ 사람은 아닙니다. 견뎌야 하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견디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몸이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들은 무엇을 두려워하기에 자기의 몸까지 상해가면서 고통을 견디는 것일까요? 


첫 번째 유력한 설명은 약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중요한 욕구 중 하나는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강하다는 것은 환경의 다양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응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것은 우리의 몸에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 남자아이들 중 상당수는 강함에 몰두하곤 합니다. 누가 누구보다 더 강한지를 따지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이지요. 강함은 권력이고, 권력은 우월함을 증명해 줍니다. 우월하다는 감각은 매혹적입니다. 나의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지요. 


강함의 가치와 매력을 맛보았거나 목격한 사람은 강함에 더욱 몰두합니다. 강함에 몰두할수록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요. 약해지는 것은 곧 권력을 잃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해진다는 의미니까요. 


어떤 직업은 고통을 오래 견디는 것을 중요한 강점으로 인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견디는 것이 ‘강함’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오직 강한 사람만이 고통을 끈질기게 견딜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통을 회피하거나 도피하는 것은 곧 약함을 의미하지요.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두 번째 유력한 설명은 타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을 몹시 꺼려합니다. 특히 가까운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을 싫어하지요. 그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바에야 자신이 모두 감당하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배고픔의 고통에 빠져 있으면 자신의 소중한 사과를 양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과 같이 친밀한 사람뿐만 아니라, 친구나 동료, 그 외에 낯선 타인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보통 사회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모두 나름의 고된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요. 그 역할 중에는 누가 담당해야 하는지 불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해야 하지요. 내가 고통을 견디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피해 주는 것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고통을 견디기로 결정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인식이 주는 고통보다 그 일을 함으로써 겪는 고통이 낫다고 보는 것이지요. 어쩌면 습관으로 자리 잡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 이들은 견디지 않아도 될 고통까지 견디면서 그렇게 고된 하루를 보냅니다. 


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되셨나요?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하여 다양한 부적응을 겪는 분도 있지만, 고통을 과도하게 견뎌서 부적응을 겪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유사한 심리를 가진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고통과잉감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 좋겠지요. 다음 시간에는 그 방법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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