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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 Jun 14. 2024

4. 우리는 이미 고통과 관련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2년 미국의 한 대학교 실험실로 어린 소녀가 들어갑니다. 소녀를 안내하던 실험자는 실험실 안 상자에 있는 장난감을 보여주면서 잠시 후에 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다음에는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소녀를 데려가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힙니다. 테이블에는 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실험자는 소녀에게 벨을 눌러 신호를 보내는 방법을 알려주고 몇 번 연습을 합니다. 실험자가 방 문을 닫고 나가면, 소녀가 벨을 눌러 신호를 보내고, 신호를 들은 실험자가 다시 방으로 돌아오는 놀이를 몇 번 반복합니다. 


소녀가 벨을 사용하는 방법과 기능을 충분히 익힌 뒤 방 안에 있던 또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깁니다. 실험자와 소녀는 마주 보고 앉았고, 테이블 가운데에는 가림막이 있었지요. 


실험자는 가림막 뒤에 있던 케이크 통을 꺼내 소녀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통 아래에 뭐가 있는지 한 번 볼까?” 통을 들어 올리니 아래에 마시멜로와 프레츨 과자가 나옵니다. 


실험자는 소녀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둘 중에 어떤 것을 먹고 싶은지 물어봅니다. 소녀는 마시멜로라고 답하지요. 그러자 실험자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와야 할 것 같다고 하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마시멜로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만일 기다리기 싫다면 아까 눌렀던 벨을 눌러서 실험자를 부를 수 있지만, 그 경우에는 마시멜로를 먹지 못하고 프레첼을 먹게 될 거라는 말도 덧붙였지요. 이후 실험자는 방을 빠져나갑니다. 


인생 최대의 위기


소녀는 고민합니다. 마시멜로를 먹고 싶기는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를 실험자를 기다리자니 마음이 초조해졌지요. 마시멜로보다는 못하지만 프레첼도 먹을 만하니 그냥 벨을 누를까 싶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마시멜로가 낫겠습니다. 


각성 수준이 올라갑니다. 그냥 눈앞에 있는데 확 먹어버릴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허락 없이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무서운 표정이 떠올라 참습니다. 다시 초조해집니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던 참에 옆에 있던 장난감이 눈에 들어옵니다. 장난감은 가지고 놀아도 된다고 했으니,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 보기로 합니다. 꽤 재미있습니다. 마시멜로 생각도 덜 나고 기분도 조금 나아집니다. 가끔씩 마시멜로의 하얗고 부드러운 자태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놀고 있자, 실험자가 들어옵니다.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실험자는 앞서 약속한 대로 소녀에게 마시멜로를 먹도록 허락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한 입 베어 뭅니다. 이보다 맛있을 수 없습니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리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믿음이 조금 더 강해집니다. 




소녀가 참가한 실험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였던 월터 미쉘(Walter Mischel)이 스탠포드 대학에서 근무할 당시 진행한 실험이었습니다. 마시멜로 실험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이 실험에서 중요하게 다룬 개념은 만족지연(delayed gratification)입니다. 말 그대로 만족을 지연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즉각적인 만족이 가능할 때, 만족을 지연하면서 일정 시간이 지난 뒤의 더 큰 만족을 기다리는 능력이지요. 


미쉘 교수가 쓴 베스트셀러입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 많은 노력과 기술이 필요한 복잡한 과정입니다. 일단 즉각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인 충동을 억제해야 합니다. 충동을 억제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지요. 에너지는 늘 한정적입니다. 에너지가 소모될수록 억제하는 것은 더 어려워지겠지요. 


차라리 지금이라도 만족을 취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끊임없는 유혹으로 더욱 초조해지기도 합니다. 기다린다고 원하는 보상이 꼭 주어지는 것은 아니잖아? 라는 꽤 그럴듯한 생각도 여러분을 괴롭힐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지속적으로 여러분의 각성 수준을 끌어올리겠지요. 이 상태를 견디면서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합니다. 소녀가 했던 것처럼 ‘다른 행동’을 하면서 주의를 돌리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적정한 수준으로 각성을 조절하는 기술입니다. 


당연히 소녀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각성 수준을 낮춰준다는 것을 알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험적으로 파악한 것이겠지요. 이처럼 우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신의 각성 수준을 조절하며 더 큰 보상을 기다리는 법을 스스로 배우기도 합니다. 


그 방법이 성공적이라면 적절히 만족을 지연해서 더 큰 보상을 얻을 것이고, 그 경험은 여러분의 뇌에 그대로 저장될 겁니다. 마치 소녀가 그랬던 것처럼 ‘기다리면 더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나 ‘나는 기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질 수도 있겠지요. 




만족지연 능력이 강한 사람은 고통도 잘 견딜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통을 견디는 것은 결국 회피하거나 도피하고 싶은 일차적 충동을 억제하면서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통을 견디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함이고요. 


그렇게 보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발달시켜 왔을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고통감내력이 꽤 높은 수준이라면 고통을 견디는 경험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왔기 때문이겠지요. 그렇게 고통을 견디는 경험이 누적될 수 있었던 것은 고통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얻었기 때문일 것이고요. 


반대의 과정도 가능합니다. 즉각적인 만족, 혹은 즉각적인 고통회피를 하지 않고 기다렸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마시멜로를 줄 것이라고 믿었던 실험자가 끝내 돌아오지 않은 것이지요. 


기대했던 장기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만족을 지연할 이유도, 고통을 견딜 이유도 없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된다면, 고통을 견디는 능력은 강화될 수 없겠지요. 오히려 고통을 회피하거나 도피하는 습관이 형성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고통감내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라면, 과거에 고통을 견디는 행동이 보상과 연결되지 못했거나, 혹은 처벌로 이어졌던 경험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 바랍니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억제능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인 억제능력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지요. 억제능력이 애초에 다른 사람들보다 낮은 편이었다면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경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만족을 지연하거나 고통을 견디는 측면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억제능력이 낮은 편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계획과 실행을 통해 보상 경험을 한다면 얼마든지 고통감내력을 향상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습관의 관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고통을 회피하는 습관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면 충분히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새로운 습관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이 과정은 한 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잘 바뀐 것 같다가도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오곤 하지요. 이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어차피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것이지요. 이 순간을 잘 이겨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용없는 노력은 없습니다. 다만 그 성과가 원하는 때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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