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지나치게 오랜 견딜 때 일어나는 두 번째 문제는 정서적 마비(emotional numbness)입니다. 마비는 신경이나 근육이 형태의 변화 없이 기능을 잃어 감각이 없어지거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정서적 마비란 신경학적 형태의 변화 없이 정서 기능이 사라진 듯한 상태를 의미하지요. 간단히 말해 슬픔을 느껴야 할 때 슬픔을 느끼지 못하고, 분노를 느껴야 할 때 분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히 심각한 수준의 고통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정서가 마비된 듯한 인상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표정변화가 거의 없고 주변의 정서 자극에도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지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즐겁게 웃고 있는데 무표정하게 가만히 있기도 하고,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모두 슬퍼할 때 함께 울지 못하고 멍하게 있기도 합니다.
미국 보스턴 대학의 교수 브렛 리츠(Brett Litz)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를 오랫동안 연구해 왔습니다. 그는 특히 참전용사들의 PTSD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지요.
PTSD란 외상(trauma)을 경험하고 난 뒤에 일정 기간 이상 심각한 수준의 스트레스 반응을 나타내는 장애를 말합니다. 외상은 실질적으로 생명을 위협했던 사건이나 위협을 느꼈던 사건, 심각한 상해, 성폭력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매우 심각한 스트레스원으로 고려되어 외상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붙입니다. 이렇게 강력한 스트레스원에 노출되면 우리의 몸은 그야말로 비상상황이 됩니다. 평소라면 경험하지 못할 스트레스 반응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다행스럽게도 적절히 스트레스에 대처하여 일시적으로만 고통을 받다가 다시 회복합니다. 이들 또한 매우 강렬한 스트레스 반응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대략 한 달 이내에 어느 정도 진정이 되는 것입니다.
한 달이 넘도록 지속적으로 스트레스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반복적으로 외상과 관련된 생각이나 이미지, 감각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각성 수준 또한 높게 상승된 채로 유지되어 수면에 어려움을 겪고, 주변 자극에 과도하게 놀라거나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외상과 관련된 자극이나 상황에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리면서 회피합니다. 그 결과 이들의 생활은 크게 바뀌지요. 자기 자신이나 주변 세상, 미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집니다. 이들은 삶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이러한 증상들로 인해 심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거나 뚜렷한 적응 문제가 나타나면 PTSD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리츠 교수는 PTSD 환자들의 다양한 증상을 꼼꼼하게 분석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정서적 특성에 주목했습니다. 이들은 두려움이나 공포와 같은 강렬한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감각했습니다. 가족이나 동료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충분히 즐거워하지 못했지요. 마치 주변 상황과 분리되어 홀로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정서적 반응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리츠 교수와 동료들은 PTSD환자들이 정서적으로 무감각해지는 이유가 에너지 고갈 때문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연구 결과, 실제로 이들은 과도한 각성 상태를 관리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한 나머지 정서적 반응에 사용할 에너지가 고갈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면 마찬가지로 각성 수준이 높아지고, 이를 관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사용될 겁니다. 그 결과 다른 곳에 사용할 에너지가 줄어들겠지요. 상황을 적절히 파악하고, 중요한 정서적 자극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마비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싶은 분도 있을 겁니다. 감정적으로 소모되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상상을 해 봅시다. 여러분의 주변에 정서적으로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고 무표정하게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는 겁니다. 어떨까요? 그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전염되길 기대합니다. 내가 웃으면 상대도 웃고, 내가 울면 상대도 슬퍼하길 바라는 것이지요. 감정의 색깔이 전혀 다르거나 아예 감정이 유발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불편함을 느끼며 멀리하게 됩니다. 감정이 다르다는 것은 곧 생각이 다름을 의미하고, 중요한 순간에 나와는 다른 방향으로 반응하거나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거나,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만큼 불편한 것도 드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정서적 마비 현상을 나타내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쉽습니다.
정서적 마비를 경험하는 본인 또한 비슷한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멀리 하게 됩니다. 나는 즐겁지 않은데 저 사람들은 뭐가 저렇게 즐거울까, 하는 생각은 꽤나 고통스럽습니다. 다른 세상에 사는 듯한 느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지요. 자신에게 어떤 문제나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기 가치감을 갉아먹기 때문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정서적 마비 현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특히 긍정적 감정 반응이 두드러지게 감소한다고 합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우리가 삶을 살 만하다고 느끼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긍정적 감정이니까요.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문제이며, 긍정적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도 심각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