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는 것의 세 번째 부정적 영향은 비인간화(dehumanization)입니다. 비인간화라는 개념이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개념은 심리학 영역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요. 이 개념은 인간다움(humanness)을 잃어가는 과정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되었습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철학적 논쟁을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정말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인간다움을 정의합니다. '사람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는 말이지요. 비인간화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인간다움의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고 인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람이라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짐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강해질수록 비인간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다움에 대한 심리학 연구는 주로 사회심리학 영역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대학의 심리학 교수 닉 해슬람(Nick Haslam)은 비인간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대표적 학자입니다.
그에 따르면, 기존의 비인간화 연구들은 타인을 인간으로 지각하는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지각하는지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타인을 인간으로 지각하는지의 여부가 타인에 대한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요. 타인이 나와 동일한 인간이라고 인식하면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면서 우호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동일한 인간에 대해 취하는 행동을 거두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겠지요.
관련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타인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인식할 때 주로 비교되는 대상은 동물과 기계였습니다. 상대를 동물이나 기계로 본다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동물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비해 사회적 규칙에 덜 민감하며, 도덕성이나 윤리의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상대가 이런 특성을 보인다면 인간이 아닌 동물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계는 감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프로그램을 입력하지 않으면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지요. 어떤 사람이 이런 특성을 보일 때 우리는 그를 인간이 아닌 기계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기계로 보면 동물이나 기계에게 할 법한 행동을 합니다. 물론 동물을 인간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라면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맞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핸드폰이나 노트북, 자동차와 같은 기계를 사람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핸드폰과 남자친구가 호수에 빠졌는데 핸드폰을 먼저 구해야 할지, 아니면 남자친구를 먼저 구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는 겁니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인간과 동물, 기계를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상사한테 혼이 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집에 돌아와 잘 놀고 있는 멍멍이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화풀이를 하는 겁니다. 너무 오랫동안 청소를 해 주지 않아서 먼지가 쌓일 대로 쌓인 컴퓨터에게 “저런 내가 그동안 너무 소홀했지? 내가 깨끗이 청소해 줄게”라고 다정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더 충격적인 사실은 스스로를 비인간화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혹은 자기 자신이 인간이 아니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인식과정을 자기 비인간화(self-dehumanization)라고 부릅니다. 자기 자신이 동물이나 기계 같다고 느끼는 것도 일종의 자기 비인간화이지만, 이 두 비교 대상에만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중요한 다른 영역들을 놓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자기 비인간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임상활동을 하면서 이런 말을 종종 들었기 때문이지요. “선생님, 이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는 사람답게 살고 싶은데, 전혀 그렇지 못해요.”
맞습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말을 하는 분이 많았던 것이지요. 그때부터였습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죽음까지 고려하게 되는지가 궁금해졌지요. 그래서 여기저기에 물어보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만난 한 학생은 사람답게 살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산다.
주변 사람들에게 적당히 의지하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면서 산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간 대접을 받는다. (최소한의 존중을 받는다.)
내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조금은 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감정을 지나치게 억제하지는 않는다.
그 학생은 이 기준이 ‘살아갈 만하다’고 느끼는 마지노선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이라는 의미이지요. 이 지점에서 밀리면 그야말로 위험한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의 삶은 이 다섯 개의 기둥으로 지탱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기둥이 하나 둘 부서져도 남은 기둥이 있다면 삶은 무너지지 않겠지요. 하지만 모든 기둥이 부서지면 그의 삶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인간이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때의 고통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겪는 고통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 중단해야 하는가와 직결되는 고통이기 때문이지요.
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는 사람들은 몇 가지 측면에서 자기 비인간화에 취약해집니다.
우선 정서적 마비현상으로 자기 자신의 욕구나 감정과 동떨어진 느낌을 받기 쉽습니다. 특히 긍정적 감정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정서적 마비로 인한 타격이 매우 크겠지요.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감도 자기 비인간화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다르다’는 인식만으로도 자기 비인간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타인과의 거리감은 양방향으로 작동합니다. 거리감을 느끼면서 위축된 행동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도 거리를 두면서 외면하는 행동을 보이지요. 그럴수록 배려받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은 감소할 겁니다. 어쩌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짐이 된다는 인식을 일시적으로 덜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인정하고 지지해 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도 ‘정상’이라고 인식되는 범위 내에서만 유지됩니다. 과도하다고 인식되는 순간 인정과 지지는 비난으로 돌변할 수 있지요. 과도한 희생은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을 도우려 한 행동이 오히려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는 기둥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고통을 과도하게 견디는 다양한 부정적 영향이 모두 중요하지만, 자기 비인간화를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자기 비인간화는 일종의 지표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더 견딜 것인지, 아니면 도망칠 것인지를 정하는 기준이지요.
자신의 인간다움을 잃어가면서까지 견뎌야 할 고통은 없습니다. 고통은 우리가 좀 더 잘 살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시스템입니다. 이 목적을 잃어버린 고통은 우리에게 의미가 없지요.
만일 여러분이 중요하게 여기는 인간다움의 조건이 모두 무너지고 있다면,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말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이 고통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