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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Nov 20. 2022

기꺼이 잎을 떨구는 나무처럼, 한껏 울긋불긋한 단풍처럼

<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팔랑~, 팔랑~, 팔랑~'


노오란 은행잎이 바람결에 나부낀다. 나풀거리는 은행잎이 꼭 노란 나비같다. 낼 모레 육십이 되어가는데도 은행잎이 바람결에 나부끼는 모습은 처음 보는 듯하다. 신기하게도 삶은 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물론 나비와 은행잎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나비는 지가 날아다니는 거지만 은행잎은 바람에 흔들리는 거다. 더운 여름의 습기가 가을 바람과 함께 사라져가며 거리의 나뭇잎들도 바스락바스락 말라가고 결국 떨어져 '낙엽'이 되고 만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떨어져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들을 보면 '감정이입'을 하게된다. '인생 무상', 이러고. 



그런데 올해는 좀 달리 생각이 든다. 왜 굳이 떨어지는 나뭇잎에 감정 이입을 해야 하지? 낙엽과 함께 떨어지려는 마음, '나무를 봐!', 내 마음이 외친다. 지난 봄부터 푸릇하게 시작되었던 잎들의 여정, 한여름 더위를 견디며 무성해진 잎들이 이제 가을과 함께 울긋불긋 단풍이 들더니 떨어져 내린다. 일년의 수고로움을 뒤로하고, 한편에서 홀가분하지 않을까. 누구나 그런 적이 있지 않은가. 잔뜩 차려입고 외출을 하고 돌아와 옷을 한 겹씩 벗어던질 때 '아이고 시원해라~', 나로 말하면 오전 내내 입었던 갑옷같은 레깅스와 나시를 벗고 나면 말 그대로 살 것같다. 어쩌면 나무도 그러지 않을까. 그렇듯이 굳이 잎을 떨구는 나무의 쓸쓸함에만 천착할 필요가 있는가 싶다. 



기꺼이 잎을 떨구는 나무 


그런 생각이 생뚱맞지도  않은 게 과학적으로도 그렇다. 사시사철 푸른 침엽수를 제외한 나무들은 엽록소로 인해  봄과 여름에는 푸른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다 일조량이 줄고 온도가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나무는 줄기와 잎 사이에 ‘떨겨’를 만든다. 나무 본체를 보호하기 위해 잎으로 가는 수분을 차단하는 것이다. 가을 이후부터는 광합성으로 만드는 에너지보다 그 광합성을 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 손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건 나무의 '경제적 행위'이고, 긴 겨울을 살아내기 위한 현명한 선택인 것이다. 





무성한 잎들을 거느리는 '번성'은 그만큼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주변에 손주, 손녀들을 돌보는 어르신들 '골병이 든다'고도 하신다.  젊어서야 아이가 울면 덥석 업고 안고 하며 얼르고 달랠 터이지만, 노년의 체력은 손주, 손녀 한 명을 감당하기가 버겁다는 뜻일게다.  물론 그 마저도 더 나이가 들면 쉽지 않다.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버거워지는 시간이 다가올 것이다. 결국에 남는 건 나일 뿐이다. 물론 자식들과 함께 손주, 손녀들을 돌보며 다복하게 살아가는 노년의 시절도 있겠지만, 대부분 나이가 든다는 건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들처럼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하나 둘씩, 그러다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후두두둑, 비라도 한번 올라치면 뭉텅뭉텅, 거리에 쌓이는 낙엽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드러나는 가지들을 보면서 비감해지는 대신, 또 다른 의미에서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자의든 타의였든, 혹은 때가 되었든 되지 않았었든 저 나무들처럼 나를 둘러싼 잎들을 떨구어 가는 긴 겨울의 여정에 서있다. 아니, 아직 '나목'으로 맞이하는 겨울은 아닐 지도 모르겠다. 그 보다는 한참 울긋불긋할 나인가.



그런데 저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이 나뭇잎이 가진 본래의 색이란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선선한 날씨와 함께 떨겨가 만들어지면 엽록소는 파괴되고 엽록소에 가려졌던 원래의 색소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즉 울긋불긋한 단풍색이 진짜 저마다 나무의 잎 색이다. 청춘, 젊음, 그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삶이 주는 '과제'들을 지내고, 이제 비로소 온전히 나로 서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 울긋불긋할 나이 


한동안 방송가는 물론 각종 강연계를 회자하던 김정운 박사를 이제 우리는 자주 만날 수가 없다. 헬기를 타면서 까지 일정을 다니는 그는 오십 대 중반 이른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우고, 책을 썼다. 그는 말한다. 아마도 계속 살았더라면 정가를 전전했을 텐데, 일찌기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김정운 박사의 책에서 저런 내용을 읽고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시간의 의미들을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얼마 전 파킨슨 병 투병을 하시는 이모부님께서 입원을 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요양 병원으로 머무셔야 할 이모부님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야 할 처지가 되었다. 이모부님의 아내로 살아오시고, 파킨슨 병 투병 이후에 더더욱 하루 종일 남편과 함께 지내시던 이모님은 홀로 남겨진 시간을 버거워 하셨다. 멀리 지방에 사는 딸네 집에 오라고 해도 싫다. 어디 문화센터라도 다니시라 해도 싫다. 그저 퇴원하실 이모부님만을 기다리며 하루를 우두커니 보내고 계셨다. 이모님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자신의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어보이셨다. 그러니 이모부님이 돌아오셔야 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홀로 지내며 가장 힘들었던 건 나 자신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건 그냥 밥을 혼자 먹을 수 있다거나, 혼자 뭘 한다거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꺼이 겨울을 지내기 위해 단풍을 떨구는 나무처럼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벗어나 나라는 주체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밥 반찬 하나를 해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한다면서 살아온 시간들이 쉬이 나라는 중심으로 새로 형성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나무를 보며, 인생무상으로 고개를 떨구는 대신, 잎들을 떨구며 홀가분해하지 않을까 하고 시선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준에는 이른건가 싶기도 하다. 살림 작파하고 이 나이에 뭔 팔자여, 하는 대신 기꺼이 잎을 떨구는 나무를 본받아 보기로 했다. 매일매일 걸어서 오고가다 보니 그 짧다는 가을이 길게 느껴진다. 잠시 울긋불긋하다 지는가 싶은 낙엽들이 그 짧은 시간 저마다 최선을 다해 붉어지고 노래지는 걸 보게 된다. 아직은 한참 울긋불긋할 나이, 최선을 다해 물들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러고 자신을 독려해 본다. 



단풍이 뭐라고, 낙엽이 뭐라고 거기에 그리 의미 부여를 하는가 싶겠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스토리텔렝(Storytelling)에서 찾는다. 보여지는 사물에 저마다의 의미부여를 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내는 것이 인간 종족의 장점이고, 그 장점이 인류의 장대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 장대한 스토리텔링을 꼭 뭐 정치, 사회, 문화에만 쓸 일이 있는가. 나 사는데,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단단해지기 위해 좀 쓰면 어떤가 싶다. 그래서 나는  떨어지는 낙엽 대신, 의연한 나무를 본다. 그리고 짧은 가을이 무색하게 봄날의 꽃보다도 더 화려한 비쥬얼을 뽐내는 단풍들을 본다. 따지자면 봄날의 꽃도 무상(無常; 덧없음)이고, 가을날의 단풍도 무상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다 무상이다. 하지만 그 무상의 시간을 저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살아있는 것들의 몫이자,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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