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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톺아보기 Dec 29. 2022

 그리움은 사랑이 아니다.

<낼 모레 육십, 독립선언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아니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이가 없던 큰아버지 내외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작은 집 셋째 딸을 자신들의 아이로 들였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 국민학교 2학년 무렵 큰 아버지 내외는 이혼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전한 그 큰어머니라는 사람과 큰 아버지가 바람을 폈기 때문이다. 친부모님 댁으로, 다시 친할머니 댁으로 전전하던 아이는 제 발로 길러 준 큰 어머니 집을 향했고, 그때부터 아주 오래오래 아버지로써 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오래오래 큰아버지를 아버지라 여기며 그리워하던 아이가 큰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낼 모레 육십이 될 즈음에서 였다. 구십 줄을 넘은 큰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냐는 말에 두 아이를 데리고 찾아뵈었다. 여전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시던 큰아버지, '이렇게 뵙게 되는구나', 감회와 회한이 오갔다. 그 후로 몇 번, 올 겨울이 막 시작될 즈음, 요양병원으로 가실 것같다는 말에 부랴부랴 찾아뵌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 큰아버지 


큰아버지의 장례식은 단촐하다 못해 적적했다. 큰어머니라는 분과의 사이에서 낳았다는, 큰아버지의 자부심이라는 아들은 부재했다. "아이고, 우리 딸, 우리가 열 살 때까지 키웠지, 아버지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큰어머니라는 분은 자신의 딸에게 눈치가 보였는지 되지도 않는 말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예뻐했는데.....'라는 말이 꼬리를 길게 늘여 나를 휘감는다. 죽지도 않는다며 싸구려 요양병원을 알아보겠다는 큰 어머니 앞에서 고모님과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시라며 생각보다 병원비가 많이 든다며 요양병원 행을 말렸다. '한 집안을 뒤집어 엎으며 사신 분의 말년이 참...... ' 돌아나오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또한 큰아버지가 선택한 길이다 싶었다.



큰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삶에 충실했다. 자신이 선택한 가족을 위해 오래도록 일했고, 두 아이들을 유학까지 보내며 뒷바라지했다. 그런 아버지의 삶에 한때 딸이었던 내 자리는 없었다. 제 아무리 이뻐했어도, 그래서 두고두고 내 얘기를 했어도, 그 후로 몇 십년 동안, 열 살 먹은 아이가 머리가 허연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는 내게 밥 한 끼 사준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처음 찾아 뵌 날 식구들 눈을 피해 구석방으로 데려가 꼭꼭 접은 이십 만 원을 누가 볼까 쉬쉬하며 건넨 게 아버지가 드러낸 마음의 전부였다. 



올 한 해 큰 아버지와 큰 어머니 두 분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공교롭게도 같은 화장장에서 세상과의 마지막 통과 의례를 치르신 두 분, 한 해에 떠나가시는 두 분의 뒷모습이 내게 오래오래 그림자로 남는다. 큰 아버지, 큰 어머니라고 했지만, 태어난 오리가 처음 본 이를 자신의 부모로 느끼듯, 나에게 큰 아버지, 큰 어머니는 아버지, 어머니였다. 친부모님이 계셔도 딱히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산 기억이 없으니 부모로서의 정을 느낄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리움은 사랑이 아니다 


심리학에는 '내면 아이'라는 용어가 있다. 우리 모두의 무의식 속에는 '아이'가 한 명 살고 있다는 말이다. 주변에 지방 출신이신 분들이 있는데 그 분들 중에는 말 끝마다 내가 '시골 사람'이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따지고 보면 그 분들이 '시골'을 떠나온 건 몇 십 년 전이다. 몇 십 년을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왔어도 그 분들은 여전히 어릴 적 그 시골에서 살던 아이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즉 자기 삶에서 '애착'이 형성된, 혹은 그 '애착'을 상실한 그 시절에 우리는 머무르곤 한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가장 가슴아픈 순간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올 한 해 함께 산 시간이야 어떻든 나에게는 '부모'로 각인되었던 두 분을 함께 떠나보내고 나니, 새삼 '고아'가 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던 내 마음 속 '아이'를 새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낼 모레 육십이 되어도 여전히 자꾸 열 살 무렵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그 '아이'를. 



지난 봄 큰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었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시면서도 그래도 그럭저럭 버티시나보다 했는데 거기까지가 어머니에게 허락된 삶인듯 저녁 무렵 조용히 돌아가셨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던 어머니의 모습은 평생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해보이셨다. 평생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줄 그 누군가를 기대고 바라느라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고 떠나가게 만드셨던 어머니, 그래서 늘 그런 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 한 해가 저물기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비로소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제대로 보였다. 난 오래오래 아버지를 그리워했지만, 아버지랑 나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예뻐했던 마음만으로는, 혹은 그리움만으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 지나간 시간일 뿐이었다. 그 열 살 무렵의 시간에 관성처럼 자꾸 회귀했던 나는,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으로 방황했고, '아버지'같은 대상에 천착했으며, 때론 아버지가 몰래 준 이십 만원같은 관계에 연연했던 것같다. 큰어머니를 반면교사로 삼는다 하면서도 나는 또 다른 버전의 큰어머니로 오랜 시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낼 모레 육십에 독립선언을 한다면서 뭔 아버지, 어머닌가 싶겠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 큰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를 찾으셨었다. 노년이 되어서도 당신을 무조건 사랑해주고 받아주던 그 '애착'의 대상에 대한 끝없는 갈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눈을 감고나서야 비로소 어머니는 편해지신 것 같았다. 



큰아버지를 보내며 비로소 나의 그리움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시인하게 되었다. 사랑은 서로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어머니처럼 아주 오랫동안 그리움만으로 이제는 그림자만 남은 관계들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 두 분이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심리학자 에릭 번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인생 각본'으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자신만의 인생 시나리오이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 시나리오인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부모'이다. 우리는 아니다 하면서도 부모가 살던 대로, 혹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자아의 모습 그대로 인생을 살아가기 십상이다. 나 역시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쉬이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나만의 인생 시나리오를 쓰려 애써보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는 말처럼.  그리 길지 않을 인생 이젠 그만 열 살의 아이를 떠나보내고 어른의 삶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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