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래가 보고 싶거든>
9월입니다. 줌 수업으로 인해 학교를 다니는 것과 다니지 않는 게 구분이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방학을 마치고 개학을 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학기, 어떤 그림책으로 이야기를 나눌까 고민하다 <고래가 보고 싶거든>을 골랐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올 여름은 유독 더웠다는 말을 잊지 않듯이, 지난 여름은 참 더웠습니다. 사실 매년 하는 말이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을 보내는 건 녹록치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여름이라는 계절동안은 저마다의 '고래'보다는 계절과의 '실랑이'가 더 우선이 되곤 합니다. '코로나'로 여행다니는 게 쉽지 않은 데도 엉덩이가 들썩이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아침 저녁 태양의 열기가 한 풀 꺽이기 시작하면 문득 올 해도 벌써 반이 훌쩍 지나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한 해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올해 하고자 했던 일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개학을 맞이한 학생들의 마음이라고 다를까 싶어서 <고래가 보고 싶거든>을 짚어 들었습니다.
고래가 보고 싶니?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줄리 폴리아노가 글을 쓰고 에린 E. 스페드가 그림을 그린 그림책입니다.
고래가 보고 싶니?
그렇다면 창문이 있어야 해. / 그리고 바다도.
시간도 있어야 해. /바라보고/ 기다리고
"저게 고래가 아닐까?" 생각할 시간
책에는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만 들리는 대답'이라는 부제가 있습니다. 글을 쓴 줄리 폴리아노는 '어린이 책에 심취해 평생을 보내다가 뒤늦게 직접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줄리 폴리아노에게 '고래'는 '그림책'이었을까요? 뉴욕 헌 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다 줄리 폴리아노를 만나 함께 그린 그림책으로 뉴욕 타임스 베스트 셀러에 선정된 에린 E 스페드는 어땠을까요?
그림책은 한 소년이 '고래'를 기다리는 이야기입니다. 텅빈 창문 앞에 오도카니 앉아있던 소년은 고래를 찾으러 떠납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을 함께 읽고 난 후 '소감'을 물어보니, 막상 아이들은 '고래'에서부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자신에게 '고래'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선생이라는 저는 학생이니 '공부를 잘 하고 싶'은 게 '고래'가 아닐까라는 '도식'(?)으로 책을 골랐는데 말이죠.
'헬리콥터 부모'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이 자신들이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교육 과정을 '프로그래밍'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업한 자녀가 회사 주변에서 식사를 할 식당 정보까지 알려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주어진 '과정'을 따라가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고래'를 떠올릴 새가 있었을까요.
고래를 찾아가는 여정
아이들과 수업을 하며 '간절한 고래'에 대한 생각조차도 제 선입견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책은 마치 그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저게 고래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살아가며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를 분명하게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고래'를 찾아가는 여정은 내게 '보고 싶은 고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건 그냥 새잖아", 깨달을 시간도.
그러니까 때론 '새'와 '고래'를 헷갈릴 수도 있는 거지요. '새'와 '고래'를 헷갈리다니 얼토당토않다구요? 100년을 살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동하잖아요. 관계의 소중함보다는 내 자존심을 앞세우는 거,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해서 내 꿈을 먼 훗날로 미루다 기회를 놓치는 거, 그런 게 다 헷갈리는 거 아닐까요.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고래'를 향한 지고지순한 기다림의 과정을 설파합니다. 고래가 언제 올지 모르니, 의자와 담요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깜박 잠들면 고래를 놓칠 수 있으니 너무 편한 의자는 안된다고 합니다. 어여쁜 분홍색 달콤한 향기를 내뿜는 장미 따위에 시선을 빼앗겨서도 안된다고 합니다. 팔락팔락 깃발을 나부끼며 가는 배에게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되겠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림책의 글밥은 소파에 누워 잠들어서는 안된다고 하고, 지나가는 배에도, 펠리컨에도 시선을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그림은 달라요. 아이는 새를 보고 '고랜가?' 하기도 하고, 장미꽃에게도, 펠리컨에게도, 하물며 작은 애벌레에게도 관심을 보입니다. 고래를 보려면 바다를 봐야 하는데 하늘 위에 둥둥 떠가는 고래 모양 구름을 보고 있습니다.
이 글밥과 그림의 어긋남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요? 어쩌면 그런 '어긋남'이 진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아닐까요? '고래'가 있는 지조차 모르는 아이들, 되돌아 보면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왔잖아요.
막연하게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지만, 정말 잘 사는 게 무얼까 늘 우리는 헷갈립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게, 등수를 몇 등 더 올리는 게 목표이던 시절을 지나, 사회 정의가 목표이던 때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게 , 혹은 결혼을 때에 맞춰 하는 게 당면의 과제이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시절을 살던, 그 시절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는 '고래'가 있다고 바삐 살아왔지요. 그런데 돌아보면 그게 '새'이고, '장미꽃'이고, 스쳐 지나가는 '배'였잖아요. 그리고 '고래'만 찾겠다고 하면서 소파에 기대어 졸던 식의 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요.
인생에서 가장 숨가쁘게 살던 시절 중에 고 3 시절이 있는데 지금에 와서 떠올리면 '열공'의 기억보다는 방과 후 함께 남아서 공부하던 애들이랑 학교 앞 분식 집을 들락거리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이 먼저 떠오르네요. 대학 시절은 또 어떤 가요. 최류탄내가 매캐한 기억은 첫사랑의 아픔과 혼재되어 있지 않던가요.
그래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이랑 하고 싶었어요. '공부'만을 위해 달려야 한다고 다그치는 세상, 초등학교 중학년 쯤부터는 학교를 끝나고 나서 다시 학원으로 달려가는 게 일상이 되는 아이들. 과연 어른들은 하루 종일 학교에 앉아있다 끼니도 대충 때우고 다시 학원에 가서 밤 늦게 까지 공부하며 십 여년을 보내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프로그램이 이미 짜여진 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고래'를 찾는 과정 자체가 이 책의 그림처럼 이곳저곳 알짱알짱거리며 가는 과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도 '고래'를 찾는 '열의'를 놓지 않는다면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언젠가 '고래'를 만날 수 있다구요. 한 해의 중반을 넘긴 9월,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전히 '고래'가 보이지 않아 조급해진 마음, <고래가 보고 싶거든>과 함께 '여유'를 가져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