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사리와 대나무>, <기다려요>, <기다려요>
일기예보가 무색해지는 계절입니다. 해가 쨍쨍나는가 싶은데 뒤돌아서면 비가 쏟아집니다. 동남아 지역의 스콜(squall)이 이런 건가 싶게 쏟아져 내리는 비, 잠시 후에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빗소리가 그치기가 무섭게 매미들이 울어제낍니다. 비와 비 사이, 그 잠깐의 틈마저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매앰, 매앰, 매앰~, 그런 매미들의 조급한 존재감에 실소를 짓다가도 그래, 지난 8년간 땅 속에서 머물던 그들에게 허락된 이 열흘 남짓의 시간들을 허투루 보낼 수 없겠지 하고 숙연해 집니다.
여름은 우리로 하여금 여유를 잃게 만드는 계절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갱신하는 온도에 이제는 선풍기를 켤까말까, 에어컨을 틀까말까 하는 인내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엊그제는 더운 바람만을 내뿜는 사우나 같은 버스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서 갈아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견디기 힘든 더위는 우리로 하여금 한철의 매미 소리마저도 짜증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여름은 옆 사람의 체온마저 경원시하게 만드는 계절이란 신영복 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럴 때 '이열치열'의 마음으로 '기다림'에 대한 그림책을 펼쳐봅니다. 그 누가 아닌 바로 이 계절을, 이 시절에 조바심을 내는 내 자신에 대한 '처방'으로 말입니다.
아버지가 남긴 씨앗 두개의 의미
마리 티비가 글을 쓰고 제레미 파예가 그림을 그린 <고사리와 대나무>는 출판연도를 다시 확인해볼 만큼 그림도, 글도 '전래동화'의 느낌이 물씬나는 그림책입니다.
'어느 지혜로운 노인이 죽음을 앞두고 두 아들을 불렀어요. 형은 힘이 세고 씩씩했고, 동생은 몸집이 작고 수즙음이 많았어요.
두 아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 지혜로운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고사리와 대나무' 씨앗을 남겨 주었어요. 고사리와 대나무, 아버지가 남겨준 이 두 씨앗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씩씩한 형은 곧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씨앗을 심고, 열심히 물을 길어다 주었어요. 반면 동생은 오랫동안 슬픔에 잠겼어요. 비로소 씨앗을 심으려는 동생, 하지만 약한 동생에게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길을 물을 지고 오는 것도 버거웠어요.
싹이 텄을까요? 산에 가면 어디든 쉬이 찾을 수 있는 게 고사리이듯이 형이 심은 고사리는 반들반들한 초록빛 싹이 터오르고 무성하게 흐드려져 갔어요. 반면 동생의 씨앗은 소식이 없었어요. '이제 그만 인정해 네 씨앗은 이미 썩었을 거야'라고 의기양양하던 형, 하지만 삼년이 지나도록 씨앗을 심은 빈터에 동생이 우두커니 앉아있자 걱정했어요. 정말 동생의 씨앗은 썩었을까요?
'나는 포기하지 않아', 아버지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며 다짐하던 동생은 하루도 빠짐없이 물을 길어다가 씨앗을 심은 곳에 뿌렸어요. 그렇게 오년 째가 되던 날 드디어 대나무 싹이 돋아났어요. 돋보기로 봐야만 하는 작고 여린 싹이었어요 그런데 다음 날 대나무는 무려 일 미터나 자랐어요. 쉴 새 없어 쑥쑥 자라기 시작한 대나무, 육년 째가 되자 숲을 이뤘습니다. 오년을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린 대나무, 8년을 땅 속에서 기다리는 매미, 긴 기다림의 뒤에야 오는 것들이 있는데, 근시안의 우리는 그걸 기다려 줄 여유를 종종 잃곤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거라고
<고사리와 대나무>는 흥부놀부처럼 착하고 나쁘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몸집이 작고 마음도 여리던 동생은 오년 동안 대나무 싹을 틔우기 위해 물도 주고, 포기하지 않으며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대나무처럼 단단한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온 땅에 번성한 고사리가 말라죽지 않을 그늘이 되어줄 수 있도록 말이지요.
'대나무와 고사리는 서로 다르지만 이 숲을 멋지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필요하지. 인생의 어떤 날도 아쉬워하지 말아라. 좋은 날은 너희를 행복하게 해주고. 힘든 날은 너희에게 경험을 준단다.'
기다리고, 기다려요
김영진 작가의 <기다려요>는 영롱한 빨간 방울 토마토가 가득한 그림책입니다. 그림책 속 주인공 토끼 키토는 <고사리와 대나무>의 형같은 아이? 아니 거기서 한 술 더 뜬 아이입니다. 무엇이든 앞서가려고 노력했지요. 늘 먼저 발표하고, 그림도 빨리 그리고, 청소도 제일 깨끗하게, 제일 먼저, 무엇이든 최고여야 한다고 생각한 키토는 가끔 '더 잘할 수 있잖아'하면서 친구들을 답답해 했어요. 특히 느린 곰돌이 친구 연두를 제일 답답해 했어요.
방울토마토 키우기 수업을 하는 날, 키토는 '목마르지 않게 물을 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줄래요!'라며 제일 먼저 답했지만, 안타깝게도 키토의 방울토마토는 끼토같지 않았어요. 뒤늦게 싹이 났지만, 제일 작았어요. 불안해진 키토,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네는 연두에게 한껏 짜증을 내고 말았어요. 그래도 연두는 키토에게 다가와 '식물보약'이라며 작은 봉투를 내밀었어요.
'그러면 금방 자라?'/ 아니, 기다려야지,
얼마나? / 그야 모르지, 그냥 기다리는 거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림체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기다려야지'입니다. 비료를 뿌려 더 빨리 자라게 하고 싶지만, '그냥 기다려보자'합니다. 마음은 빨간 방울토마토천지이지만 이구동성 '기다려야지'라며 초록색 방울 토마토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아마도 앞서 이야기의 형이나, 키토에게 대나무 싹을 주었다면 오년이나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든 잘한다며 앞서나가던 키토가 느리고 답답한 연두를 통해 비로소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게 됩니다. 빨간 벽돌 유치원 시리즈 중 한 권, 하지만 키토처럼 살아가는 어른이를 돌아보게 합니다.
김현경 작가의 <기다려요>는 산불로 초토화된 숲속 상수리 나무가 주인공입니다. 애벌레와 다람쥐와, 나비와 개구리, 물까치와 함께 어우러져 숲을 이루던 상수리 나무는 산불로 모든 것을 잃고 '그루터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숲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죠',
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가고, 겨울이 지나고, 세 번째로 봄이 찾아온 계절, 바스락, 뎅구르르 비로소 숲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10년, 20년,.....100년, 숲이 제 모습을 찾고 떠난 친구들이 되돌아오기를, 숲의 지킴이 상수리 나무는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100년의 시간만을 겨우 욕심내는 인간사에 상수리 나무의 기다림은 아득합니다. 그래도 기다림의 그림책을 보니, 마음에 여유로운 바람 한 자락이 불어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