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목록: 서울 집 (5년 전 담음)_28
남편과 나는 지금 신혼집에 월세로 살고 있다.
결혼을 준비하던 시기에 우리는 거주할 집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보러 다녔다.
처음부터 매매를 해서 들어가면 가장 좋았겠지만, 결혼 준비 기간이 짧아서 매매를 결정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또 충분히 좋은 집을 마련할 만큼의 자금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보증금을 크게 묶어두지 않는 월세로 거주하면서 좋은 매수 기회를 기다리자는 전략을 세웠다.
‘내 집’을 골라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2년가량 거주할 월세 집을 고르는 것은 부담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서 몸테크*할 자신은 없었다. 동시에 향후 집 매수를 위해 비용은 아꼈어야 하기 때문에, 서울 안 구축 아파트에 사는 대신 직장에서 좀 멀지만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 신축 아파트를 선택했다.
거리가 먼 곳으로 출퇴근하는 걸로 몸테크*를 대신한 셈이다.
*몸테크: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비용을 절약하는 것
네이버 부동산으로 가볍게 서칭을 하던 중, 신축인데 전세가가 비교적 낮은 집이 눈에 띄었다. 사진만 봐도 느낌이 좋아 다음 날 바로 부동산과 약속을 잡았다.
부동산에서 몇 개 매물을 더 보여줬지만, 처음 본 집만큼 마음을 사로잡는 곳은 없었다. 딱 한 가지 문제는 그 집이 전세 매물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보증금을 대폭 낮추고 대신 월세로 조정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다행히 집주인은 크게 개의치 않고 가능하다고 했다.
그 집을 보러 갔던 날이 우리가 지금의 집주인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집주인 부부는 우리보다 두 살 정도 많고, 어린 딸이 있는 젊은 가족이었다. 우리가 집을 보러 방문했을 때 온 가족이 집에 있었다.
외출을 앞두고 있었다며 모두가 멋지게 차려입고 헤어 세팅까지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우리 남편과 나는 둘 다 키가 큰 편인데, 그 부부는 우리보다 더 커 보였다.
부동산 소장님이 집 소개를 하려 하자 남편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저희 집이니까 제가 직접 소개해 드릴게요."
우리는 집주인 남편의 안내를 따라다니며 집을 둘러봤고, 아내분은 아이를 안고 동행했다. 일부러 본 건 아니었지만 선반에 꽂힌 서류들로 남편분이 송도에 있는 S 바이오 회사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집주인 부부는 서울로 이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서울에 자리 잡고 싶다며 지금 집은 전세로 내어놓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공덕에 살고 있었기에 마포에서 왔다고 했더니, 아내분은 직장이 시청 부근이라 마포로 이사할 예정이라며 웃었다. 서로 사는 동네를 교차하는 기분이 들어 재미있었다.
사실 집을 보러 가서 처음 보는 사이에 이렇게까지 말을 트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집주인 부부와 우리는 서로에게 비슷한 분위기와 결을 느꼈던 것 같다.
집주인 남편은 우리가 세입자로 들어오길 바라는 것 같이 말했다.
"저희 이 집에 살면서 정말 행복했거든요. 두 분 골프 치세요? 이 아파트가 골프장이 특히 진짜 잘 되어 있어요. 여기 살면 아주 만족하면서 사실 수 있을 거예요."
남편과 나는 집도 마음에 들었지만, 집주인 부부의 매력에도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차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부부 이야기를 했다.
"아까 집주인 아내분 진짜 예쁘시더라. 남편분은 성격이 자기랑 좀 비슷한 것 같아. 자신감 있게 말씀하시면서 젠틀하셨어."
"덩치도 좀 비슷한 것 같고 허허."
"청약에 당첨돼서 들어왔다던데, 지금 시세 많이 올랐잖아. 기분 좋겠다."
"그래서 부부가 그렇게 여유로워 보이나 봐. 애기도 옆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착하더만."
우리는 부동산에 연락해서 그 집으로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절차는 부동산을 통해 조율했다. 그런데 집주인이 첫인상과는 다르게, 자꾸 우리에게 이상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가계약금을 바로 보내라느니, 토요일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평일 저녁에 와서 계약서를 쓰자고 하는 등... 우리는 “돈이 급한가?” 정도로 생각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여유로운 분위기와는 너무 달라 의아했다.
부동산과의 대화는 남편이 주도했는데, 남편이 의심을 품은 부분이 있었다. 중개사 아줌마가 우리 의견을 단 한 번도 듣지 않고 공격적으로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설령 집주인이 우리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임대인과 임차인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것이 중개사의 역할 아닌가? 무엇보다 집주인과의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 직접 연락하고 싶다고 하자, 부동산 중개사는 개인정보라며 화를 내며 거절했다.
우리는 집주인이 아니라 현재 소통 중인 '막무가내 부동산'이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네이버 부동산에 같은 매물을 게시한 다른 부동산에 연락해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새로 컨택한 '친절 부동산' 소장님은 집주인에게 먼저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연락이 왔다.
“사장님, 집주인 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적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계약자분이 계약을 평일로 고집했다고 들으셨답니다. 양쪽 다 직장인인 것을 알아서 그쪽도 의아하셨다고 하네요...”
"저희가 예상한 대로 막무가내 부동산에서 잘못 전달하고 있던 것이 맞네요.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집주인 분과 통화할 수 있을까요?"
"집주인 분도 직접 한번 얘기 나눠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문자로 연락처 남겨 드릴게요."
남편과 집주인이 통화한 후, 모든 의사소통이 잘못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막무가내 부동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계약을 일찍 확정 지으려고 했고, 임대인과 임차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자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던 것이다.
집주인은 그 즉시 막무가내 부동산에게 계약을 진행하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친절 부동산에게 우리와 계약을 진행할 수 있는지 물었다.
친절 부동산은 집주인과 세입자가 먼저 연락해서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으니, 임대인과 임차인 각각에게 복비 20만 원씩을 빼주시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다음 주 토요일에 만나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막무가내 부동산 아줌마는 남편에게 전화해서 욕을 했다고 한다..)
월세 계약 날, 집주인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뜻밖의 에피소드를 함께 겪은 덕에 묘한 동료의식 같은 게 생겨 있었다. 그래서 부동산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에도 첫인사가 "아이고 고생 많으셨습니다."였다.
월세 계약서 작성을 마치자, 옆에 앉아 조용히 젤리만 먹고 있던 집주인 딸이 우리에게 말했다.
"예쁜 이모 이모부, 결혼 축하해요."
아마도 우리가 결혼식을 앞두고 있던 것을 아는 집주인 아내분이 시킨 멘트였겠지만, 그 한마디가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아이의 멘트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수다가 이어졌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세요?"
"저희는 유럽에 OO 도시로 가요."
"앗 저희도 거기 다녀왔어요!"
"우와 정말요? 직장도 비슷하고, 여러모로 겹치는 게 많아서 신기하네요."
아내분은 주말임에도 그날도 완벽한 코디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분명 이미지로만 보면 딱 승무원인데. 시청역에서 근무한다고 했으니, 혹시 대한항공 사옥에서 일하시는 걸까? 그런데 승무원이 거기로도 출근을 하나? 이런 소소한 상상을 하면서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구하기까지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좋은 인연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새 집에서 집주인 부부처럼 멋지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 총 30편 짜리 글을 맞춰 쓰려고 다음 편은 12월로 기획했으나, 중간에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생겨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