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표적 식물학자인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자신의 저서 『싸우는 식물』에서 식물들의 치열한 생존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놓았다. 말없이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이 사실은 생존을 위해 여러 상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실제 식물들은 경쟁자들을 이용하거나 배신을 일삼고, 때론 동맹을 통해 공생하는 등 다양한 생존 전략을 구사한다고 하면서 소나무와 호두나무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뿌리에서 나오는 물질로 주변 식물의 성장을 막는 화학전을 벌이고, 콩과 식물과 쐐기풀이 해충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개미를 경호원으로 활용하는 것을 사례로 들고 있다.
어떤 식물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들이 지구의 통치자라고 여기지만, 실은 식물들이 곤충과의 협력을 통해 지구를 지배하고 있으며, 인간은 자신들이 식물을 재배하여 생존에 이용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농경의 발달이야말로 풀이 나무를 정복하기 위해 인간을 끌어들인 전형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동물도 현상과 실재가 다른 경우가 적지 않은데, 펭귄의 경우 다리가 짧은 것 같지만, 실재는 90도가량 접혀있으며, 다리를 모두 편다면 몸길이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길다. 무릎을 구부리면 더 빨리 걸을 수 있고, 빙판이 많은 남극에서는 짧은 다리로 최대한 지면과 맞닿는 것이 걷기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한 것이다.
호수에서 조용하고 우아하게 떠다니는 백조의 자태 아래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발길질이 있는 것처럼, 순백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비처럼 춤추는 발레리나의 신발 속에는 피나는 연습으로 거칠어진 상처투성이의 발이 숨어있는 것처럼 현상의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의 세계가 있다.
현상과 이면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판단에 착오를 일으키게 되는데, 일국의 지도자가 이런 착오에 빠지면 나라 전체가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20세기 중반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시키며 실패로 끝난 중국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참새’에 대한 마오쩌둥(毛澤東)의 피상적 판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은 그래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에 의해 1958년부터 1960년 사이에 진행된 경제성장 운동으로 “7년 안에 영국을 초월하고,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목표로 추진되었으나, 과도한 생산목표와 실적에 대한 조급증이 맞물리면서 많은 문제점을 양산했다.
당시 뚜렷한 성과에 목말랐던 중국 정부는 공업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촌인력의 도시 이주를 급격하게 진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도시인구의 급증은 생필품 부족을, 농촌인구의 급감은 농산물 생산의 추락을 가져왔다. 이처럼 곡물 부족의 근본 원인이 농촌인력의 감소에 있었음에도 중국 정부가 생산성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엉뚱하게도 ‘참새’였다.
1958년 어느 날 마오쩌둥이 농촌 현지 지도를 하던 중 참새를 가리키며 “저 새는 농작물을 먹어 치우는 해로운 새다”라고 한마디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하루아침에 참새는 공공의 적이 되었고, 여기에 더하여 국영 연구기관이 참새만 박멸해도 한 해 70만 명분의 곡식을 더 수확할 수 있다고 발표하면서 중국 전역에서 참새잡이 광풍이 불었다.
농민들은 농사보다 참새잡이에 골몰하였고, 약 2억 마리 정도의 참새가 포획되었다. 다행히 농촌에서 참새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으나, 정작 참새를 박멸하고 나니 더 큰 문제가 생겼다. 해충의 창궐이었다.
참새는 곡식도 먹지만 해충들도 잡아먹는데, 해충들의 천적인 참새가 사라지자 온갖 해충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하면서 대흉년이 찾아와 4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현상에 사로잡혀 역사를 되돌리려는 무모한 시도가 있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 있었던 ‘기계파괴운동’이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혁신과 함께 사회・경제적 구조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그중 가장 먼저 찾아온 변화는 가내 수공업자들이 기계와의 경쟁에서 밀려 일자리를 잃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기계를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괴물로 보았고, 기계를 파괴하면 일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19세기 초 공장이 밀집된 랭카셔・요오크셔 등을 중심으로 본격화한 기계파괴운동은 순식간에 영국의 모든 공장지대로 파급되면서 7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영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모두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조치한 결과 간신히 수습될 수 있었다.
소수의 자본가가 대규모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제품을 생산하는 기계제공업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산업의 대세였음에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깎아내리는 대형기계만 파괴하면 지난 시절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현상과 실체의 괴리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이 괴리가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로 만들어지면 상대는 필연적으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있다.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말로 겉으로는 절친한 척하지만, 내심으로는 음해할 생각을 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6세기 말 구밀복검과 같은 가식적 태도로 부모의 환심을 산 후 결정적 순간에 본성을 드러내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사악한 인물이 있었다. 중국 수(隨)나라의 2대 황제 양제(煬帝)이다.
수양제의 본명은 양광(楊廣)으로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隋文帝)의 둘째 아들이다.
수(隋)나라의 개국과 더불어 진왕(晉王)에 봉해진 양광은 야심이 대단한 인물이었음에도 내심을 감추고 황제에 이르는 길을 은밀히 다지고 있었는데, 그 첫 번째 목표는 맏이인 양용(楊勇)의 태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양광은 먼저 의관을 누추하게 하고, 집안에 값비싼 물건을 들이지 않는 등 자신을 청렴하고 검소한 인물로 위장하였고, 신하들과 사냥을 나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시종들이 비옷을 건네주었음에도 입기를 거절하며 “병사들이 모두 비를 맞고 있는데, 나 혼자 어찌 비를 피하겠는가”라며 자애로운 모습을 연출하고는 그 말이 황제 부부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한 번은 수문제가 자신의 처소를 방문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늙고 추한 여자들로만 시중들게 함으로써 여색을 멀리하는 군자인 양 처신하였고, 먼지가 쌓이고 줄이 끊어진 거문고를 잘 보이는 곳에 두어 유흥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이런 방법으로 부모의 인정을 받는 데 성공한 양광은 이어 태자를 모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루는 어머니인 문헌황후(文獻皇后)가 태자를 만나러 간다는 정보를 알아낸 후 미리 궁녀를 태자궁으로 보내 술판을 벌이도록 함으로써 태자가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고 향락에만 빠져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태자가 아버지의 이른 죽음을 바라고 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 수문제의 노여움을 일으키게 했다.
양광의 이런 노력은 효과를 발휘하여 양용은 결국 태자에서 폐위되었고, 둘째인 양광은 자연스럽게 태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602년 문헌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양광은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는데, 얼마나 애도함이 극진했던지 이를 본 문제가 감동할 정도였으나, 막상 장례식이 끝나자 처소로 돌아가 어머니의 죽음을 기뻐하며 고기를 뜯고 술판을 벌이며 질펀하게 놀았다.
문헌황후는 수문제를 휘어잡을 정도로 강단이 있었고, 실제 양광이 태자가 된 것도 그녀의 입김 때문이었다. 수서(隋書)에 따르면 양광은 어머니의 영향력을 일찍이 간파하고, 어머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오랫동안 검소한 척, 청렴한 척, 유흥을 멀리하는 척 위선적 행동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뻐했다고 한다.
문헌황후의 죽음 이후 외로움에 빠진 수문제는 자신이 멸망시킨 진(陳)나라 황녀 출신의 절세미인 진씨를 늘 곁에 두고 총애했는데, 양광 또한 진씨를 탐냈다.
진씨로 인해 기력이 쇠해진 수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면서 병석에 눕게 되자 양광은 기뻐하며 아버지가 어서 죽기를 바랐는데, 와병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인내심은 한계를 향하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가던 어느 날 양광은 궐내에 있는 자신의 측근에게 자신의 즉위를 논의하는 쪽지를 보냈는데, 궁인의 실수로 이것이 수문제에게 전달되었고, 수문제는 양광이 그동안 위선적 행동으로 일관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게다가 양광이 자신이 총애하는 진귀인을 겁탈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격노한 수문제는 양광을 태자에서 끌어내리고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려 했다.
궁중에 심어둔 측근으로부터 수문제의 태자 교체 움직임을 보고 받은 양광은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한 채 아버지를 직접 살해하고, 형인 양용마저 사람을 보내 살해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604년 36세의 나이에 뜻한 바를 이룬 양광은 그동안의 위선을 걷어내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만리장성 보수와 대운하 조성을 위해 연인원 1억 5천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을 노역장으로 내몰았고, 무모한 고구려 원정을 세 차례나 일으켜 아버지가 20년 동안 애써 쌓아놓은 국고를 재위 14년 동안 모두 탕진하였으며, 대운하의 깊이가 얕다는 이유를 들어 책임자를 포함한 현장 일꾼 5만 명을 생매장하는 등 포악함을 보였다.
유흥과 사치에도 뒤지지 않아 화장을 짙게 한 수천 명의 궁녀를 대동한 채 악극 놀이를 즐기며 음주와 가무로 날을 새기 일쑤였고, 대운하가 완성된 후에는 유람을 위해 2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대규모 선단을 건조한 후 운하의 양쪽에서 인력으로 배를 끌게 하여 지방을 순행하면서 그 지역의 지방관이 헌상한 요리와 진상품이 마음에 들면 승진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렸다.
수양제의 끝 모를 폭정은 당연하게도 백성들의 원성을 불렀고, 전국에서 조정을 뒤엎자는 봉기가 줄을 이었다. 수양제는 반란군에 밀려 도성을 버리고 피난처에 있으면서도 주색을 일삼다 자신이 가장 믿고 의지했던 근위대장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수문제 양견(楊堅)은 한(漢)나라 멸망 이후 360년의 대혼란기를 수습하고 중국을 통일한 일세의 영웅으로 자신의 치세 23년 동안 세금 경감과 농토 분배로 백성들의 삶을 크게 개선하였고, 과거제도 실시와 귀족세력 억제로 국정을 안정시켰으며, 궁정의 소비를 줄이고 검소함을 몸소 실천한 현군이었음에도 눈속임을 간파하지 못하여 자식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가 세운 왕조는 불과 3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내심을 감추고 자신을 위장하여 상대를 속이는 것은 사람 간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종종 행해지는데,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 잠재적 적국인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구사했던 외교적 눈속임이 그랬다.
1938년 9월 30일 히틀러와 뮌헨회담을 마치고 런던 헤스턴 공항에 도착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열렬히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자신과 히틀러가 서명한 수데텐 지방 합병 승인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명예로운 평화를 얻어냈다고 선언했다.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독일인의 70%가 거주하고 있던 체코의 수데텐 지방을 영토에 편입시키려 했는데, 전쟁을 꺼리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수데텐 외에 체코 영토를 추가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믿고 수데텐 지방의 독일 합병을 승인했다.
체임벌린은 자신이 체결한 그 승인문서 하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을 전쟁으로부터 구해 낼 것이라 확신했지만, 히틀러는 조약문서에 서명한 후 측근에게 “그것은 그저 한 조각 종이에 불과하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의 영토 욕심을 좌절시킬 힘이 없음을 알았고, 조약 따위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고 전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위장된 평화조약으로 주변국을 안심시킨 후 전쟁 준비에 매진하던 히틀러는 6개월 만에 약속을 뒤집고, 중무장한 독일기갑부대를 프라하로 진격시켰으며, 곧이어 체코 전역을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세계역사에서 영구적인 평화의 보장을 전제로 하는 평화조약의 효력이 지속한 것은 평균 2년 정도였다”고 말했다. 진정한 평화는 정상 간의 조약과 같은 피상적 문서 따위가 아니라, 상대를 압도할 힘이 있을 때 비로소 보장되는 것임을 알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손자(孫子)는 “필요 이상으로 이쪽 뜻에 영합하며 은밀히 군비를 증강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가까운 시기에 진격해 올 것이라 보아야 하고, 반대로 사신(使臣)이 자신 있게 큰소리를 치며 지극히 극단적인 말을 남기고 부리나케 돌아간다면 실은 퇴각할 작정이 틀림없다”고 하여 적대적 상대방의 표면적 태도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송사(宋史)』에 ‘대간사충(大姦似忠)’이라는 말이 있다. 크게 간사한 사람은 그 아첨하는 수단이 매우 교묘하므로 흡사 충성스러운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사실을 왜곡하는 거짓 현상을 간파하는 것은 쉽지 않으나, 더없이 좋아 보이는 것을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불행의 상당 부분을 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