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너머의 존재들
손글씨를 한 개인의 고유하고 불변하는 정체성의 표현이라고 가정한다면, 교실에서 해마다 반복적으로 목격되는 이 현상은 설명하기 어렵다. 학기 초만 해도 전혀 다른 개성을 뽐내던 두 아이의 글씨가, 학년이 끝날 무렵에는 마치 쌍둥이처럼 서로 닮아가는 현상 말이다.
E와 F는 이 현상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두 아이는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점심시간, 하교 시간까지 늘 붙어 다녔다. E는 전형적인 '싸인족'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외향적인 E는 필기 속도도 빨라서 글씨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자음과 모음이 거의 이어져 흘러갔다. 노트 정리는 뒷전이고 일단 받아 적는 데 집중했다. 반면 F는 내성적이고 꼼꼼한 성격으로, 글씨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가는 '장인족'에 가까웠다. F의 노트는 항상 깔끔했지만 속도가 느려 필기량이 적은 것이 흠이었다.
변화는 2학기 2차 지필고사 무렵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E의 노트에서 F 특유의 습관인, 'ㄹ' 받침을 쓸 때 아래쪽 획을 한 번 더 꼬아서 마무리하는 독특한 모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E의 거의 모든 'ㄹ'이 그렇게 변해 있었다. F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꼼꼼하게 정사각형 틀 안에 글씨를 가두던 F가, E처럼 문장의 핵심 키워드를 쓸 때는 글자 크기를 과장되게 키우고 획의 끝을 날카롭게 뽑아내기 시작했다. 속도감마저 붙어, F의 필기량은 학기 초보다 눈에 띄게 늘었다.
두 아이에게 물어보아도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했다. 이것은 의도적인 모방이 아니라, 깊은 유대감 속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동화‘였다. 우리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의 말투와 표정, 걸음걸이를 닮아가듯, 보이지 않는 영역인 손글씨마저도 서로에게 스며든다.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미러 뉴런' 시스템이 펜 끝을 통해 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현상은 손글씨에 대한 두 가지 통념을 깨뜨린다. 첫째, 손글씨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체라는 것이다. 둘째, 손글씨는 지극히 개인적인 서명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기록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글씨에는 그 사람 개인의 성향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와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밀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교사로서 나는 종종 학생 개인의 성적과 인성 변화에만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교실은 고립된 섬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기후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생태계다. 긍정적인 관계 속에서 아이들은 교사의 백 마디 훈계보다 친구의 작은 습관 하나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한다. E와 F는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며 함께 발전하고 있었다.
오늘도 교실에서는 스물몇 개의 서로 다른 필체가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어떤 글씨는 단단하게 버티고(A), 어떤 글씨는 자유롭게 유영하며(B), 어떤 글씨는 둥글게 화합하고(C), 어떤 글씨는 꼿꼿하게 원칙을 지키며(D), 또 어떤 글씨는 서로에게 물들어간다(E와 F). 그 모든 흔적 속에 아이들의 삶이, 그리고 관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 교사로서 나는 그 소중한 기록들을 읽어내는 첫 번째 독자가 될 수 있음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