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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의미 - 관심과 침범의 경계

윤리 교사의 시선

by 오이랑

아이들의 손과 글씨, 지우개똥과 낙서를 따라가던 나의 시선은 어느새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렌즈를 닦고 초점을 맞추듯, 아이들을 선명하게 보려 할수록 그 안에 비친 내 모습이 더욱 또렷해졌다. 가르치는 자의 오만, 관찰하는 자의 폭력, 그리고 한 인간의 서툰 연민이 뒤섞인 교실이라는 공간. 이제 나는 그 시선의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아이들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었음을 고백하려 한다.




중학교에서 근무할 때, 유독 마음이 쓰이는 아이가 있었다.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야구 유망주였던 G는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고 싶다며 우리 학교로 전학까지 온 아이였다. 부모님의 기대도 남달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연차를 냈고, 어머니는 매일같이 아들의 건강을 챙긴다며 교무실에 얼굴을 비췄다. G는 그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묵묵히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해 가을부터 G의 성과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타는 좀처럼 터지지 않았고, 수비에서는 결정적인 실책이 잦아졌다. 아이는 눈에 띄게 우울해졌고, 수업 시간에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버릇이 생겼다. 짧게 깎은 운동부원의 손톱 끝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아이는 무언가에 쫓기듯 입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무의식 중에 아이의 심리상태를 분석했다. '슬럼프에 대한 압박감이구나. 부모님의 기대가 너무 버거운 게지. 저런 예민한 시기에는…'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십 개의 가설과 나름의 해결책까지 세워지고 있었다. 나는 이것이 아이를 돕기 위한 교사의 당연한 노력, 즉 '애정 어린 관심'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도에서 G와 마주쳤다. 늘 그랬듯 나의 시선은 무심코 아이의 손으로 향했다. 그 순간, 아이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그 짧은 정적 속에서 나는 아이의 눈빛을 읽었다. 그것은 고마움이 아니었다. '선생님, 제발 그만 보세요.'라고 말하는 듯한,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이고 싶지 않은 간절한 불편함이었다.


그날의 눈맞춤은 내게 서늘한 깨달음을 주었다. 나의 시선은 아이에게 '관심'이 아니라,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면을 파헤치려는 '불편한 침범'일 수 있다는 사실을. 교사라는 위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오만한 관찰자로 만들었다. 나는 아이의 동의 없이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멋대로 진단하고, 심지어 값싼 연민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G가 겪었던 압박감은 고등학교 교실에서 더욱 첨예한 형태로 나타난다. 0.1점 차이로 내신 등급이 갈리고, 그 등급 하나가 입시의 성패를 좌우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아이들. 그들은 이미 성적과 결과라는 수많은 잣대 위에서 매일같이 평가받고 있다. 득점 기계가 되어야 했던 운동부 학생처럼, 아이들은 점수 따는 기계가 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런데 교사마저 그들의 작은 버릇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분석하려 들 때, 아이들은 학교의 어느 곳에서도 마음 편히 숨 쉴 공간을 찾지 못하게 된다. 나의 '봄'은 아이에게 따뜻한 햇볕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감시의 서치라이트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을 안다고 착각한다. 특히 교사는 학생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생활기록부의 기록 몇 줄, 상담 시간의 대화 몇 마디, 그리고 교실에서의 관찰 몇 장면을 짜깁기해서 '아무개는 이런 아이'라고 섣부르게 결론 내린다. 하지만 아이의 세계는 나의 얄팍한 시선 안에 결코 갇히지 않는다. 내가 보는 것은 언제나 아이의 극히 일부일 뿐이며, 그마저도 나의 주관과 편견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왜곡된 이미지일 가능성이 높다.


'본다'는 것은 어쩌면 '보지 않으려는 노력'을 동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시선이 아이를 틀 안에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조절하고 스스로를 의심해야 한다. 아이의 손톱을 보는 대신, 그 손이 무엇을 쓰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를 물어야 했다. 아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대신, 그저 그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관심과 침범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내가 찾아야 할 윤리적 균형점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시선이 아이에게 가닿기 전에, 그 시선에 담긴 나의 욕망과 편견을 먼저 들여다보려 한다. 나의 '봄'이 아이에게 상처가 아닌, 온전한 '마주 봄'이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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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