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교사의 시선
우리 사회는 '성실함'을 숭배한다. 특히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교과서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색색의 형광펜으로 요점 정리를 하고, 깜지를 쓰듯 노트를 빼곡하게 채운 학생은 어김없이 '성실한 학생'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그 노트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력의 양'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성실함은 종종 내용이 아닌 형식으로, 과정이 아닌 결과물로 평가된다.
하지만 나는 종종 생각한다. 저것이 정말 '성실'의 전부일까? 나는 의심 없이 들입다 외우고 질문 없이 수용만 하는 교실을 만들고 싶지 않다. 주어진 정보를 의심 없이 받아 적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능력이 우리가 길러야 할 최고의 덕목일까? 수업 내용 옆에 선생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자신만의 질문을 휘갈겨놓는 아이, 혹은 배운 개념을 응용해 새로운 캐릭터나 세계관을 창조해 내는 아이의 노트는 '불성실'한 것인가? 사회가, 그리고 학교가 규정한 '성실함'이라는 프레임은 얼마나 많은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딴짓'과 '산만함'으로 재단해 왔는가.
물론 안다. 질문이 많은 창의적인 교실은 시험 진도에 쫓기는 교사에게 부담이다. 때로는 복도를 순회하는 교장, 교감의 눈에 그저 '산만한 교실'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남의 이야기인 교육과정을 '내 이야기'로 가져오는 필기와 발문, 바로 거기에서 진짜 배움이 일어난다고.
특히 모든 것이 정답과 등급으로 환원되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실에서, '성실함'은 종종 '사유의 포기'와 동의어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별다를 바 없는 현실의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니까. 시험 진도에 쫓기고, 복잡한 철학 개념을 시험에 잘 나오도록 도식화하여 단순 암기를 부추길 때도 있다. 수능형 문제를 잘 푸는 기술을 전수하는 데 시간을 쏟을 때도 있다. 그런 수업이 가장 효율적으로 점수를 얻게 하는 방법임을 잘 알지만 사유가 빠진 수업은 나의 교사 효능감을 떨어뜨린다. 그래서 문제 풀이 훈련으로 내 시간을 꽉 채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칠 때보다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칠 때 아이들의 질문은 양적으로 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들이 시험을 잘 보기 위한 기술적인 질문을 넘어, 자신의 삶과 연결된 진짜 궁금증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빼곡한 노트 필기가 지적 호기심의 증거가 아니라, 오로지 시험만을 위해 지식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불안의 증거가 아니길 바란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생존을 위해 반복하는 '노동',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작업',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이 틀로 우리의 교실을 들여다본다. 시험이라는 생존 앞에서 교과서를 통째로 베껴 쓰는 아이들의 성실함은 '노동'에 가깝다. 깔끔하게 요점 정리를 해내는 것은 점수라는 목적을 위한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문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친구의 의견에 반박하고, 배운 지식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보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닐까. 우리 교육이 칭송하는 '성실함'은 대부분 '노동'과 '작업'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 아이들이 진정한 사유의 주체로서 '행위'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산만함'이라는 이름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성실함'이라는 덕목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꾸준함과 노력의 가치는 분명 존중받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 덕목을 너무나 좁고 편협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정해진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성실함만큼이나,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며 때로는 길을 벗어나는 '불온한 성실함'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는 안정감을 주지만, 생각의 흔적이 담긴 지저분한 낙서는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이제 아이들에게 말해주려 한다. 너의 노트가 조금 지저분해도 괜찮다고. 정답 대신 질문으로 가득 차 있어도 괜찮다고. 진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얼마나 많이 채웠는가가 아니라, 그 지식과 얼마나 치열하게 씨름했는가 하는 흔적 그 자체라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실함'이라는 얄팍한 잣대로 스스로를 옥죄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