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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나’는 누구인가-학생을 통해 나를 보다(1)

윤리 교사의 시선

by 오이랑

Part 1. '주는 자'에서 '배우는 자'로


교직 생활 초기, 나는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식, 지혜, 올바른 가치관 같은 것들. 나는 교단 위에서 빛나는 존재이고, 아이들은 그 빛을 받아 성장하는 존재라고 막연히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교만이었다.


한때 나는 평론가를 꿈꾸기도 했다. 세상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명쾌하게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대학 시절 내내 정치와 시사 이슈, 거대 담론에 대한 토론을 즐겼던 것도 그 꿈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된 후, 나는 분석하는 사람이기보다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렇다고 거대 담론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의 관심은 '그 거창한 이야기들이 아이들의 미시적인 일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로 옮겨갔다. 즉, '먹고사는 일'이라는 현실의 문제 속에서 그 담론을 어떻게 풀어내고 해석할 것인가가 나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맹자의,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 안정된 생업이 없으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그 고전 속 한마디가, 아이들의 현실적인 고민 속에서 비로소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교직 초반에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아이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나의 표현에 집중하기보다 타인의 표현을 해석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과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나의 꿈과 역할은 그렇게 변해왔다. 한땐 뾰족함이 무뎌지는 내가 싫기도 했지만, 그 변화조차 나라는 존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딘가 무뎌진다는 건, 다른 한편 예리해지는 부분이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깨닫는다.


나는 더 이상 교단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길을 찾는 동반자이며, 때로는 아이들보다 더 자주 길을 잃는 서툰 학습자다. 아이들은 나에게 지식을 배우지만, 나는 아이들을 통해 사랑하는 법, 솔직해지는 법, 다시 꿈꾸는 법을 배운다. 가르치는 존재에서 배우는 존재로의 변화. 그것은 나의 교직 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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