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교사의 시선
Part 2. 아이들이라는 거울 앞에 서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는 행위는 결국, 거대한 거울 앞에 나 자신을 세우는 일이었다.
때로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비겁함과 마주하기도 한다. 힘센 친구의 잘못을 뻔히 알면서도 침묵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불의를 보고도 나의 안위를 위해 눈감았던 수많은 순간의 나를 발견하면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아이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면서, 정작 나는 얼마나 정의롭게 살아왔는가.
물론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보며 끊임없이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를 만난다. 중학교 때는 누구보다 발표를 좋아했지만, 공부량이 많아진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발표가 두려워졌던 나의 과거. 그런 나를 꼭 닮은 학생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 때, 나는 그 아이에게서 나의 옛 불안을 보고,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를 배운다.
내가 잃어버린 열정을 되찾아주는 아이도 있다. 내가 평론가를 꿈꾸며 어설픈 글을 끼적이던 시절처럼,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소설을 써 내려가는 아이를 볼 때면 감탄하게 된다. 나는 감히 그 글을 평가하지 못한다. 그 아이는 이미 그 분야에서 나보다 훨씬 나은 작가다. 나는 그저 그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줄 뿐이다.
아이들을 통해 나는 나의 장점뿐 아니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까지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말을 펜으로 끄적이는 나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존중받는다고 느끼듯, 나 또한 내 강의에 필기하는 아이들을 보면 참 기특하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나의 말도 아이들의 공책에선 저마다 다른 문장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그 다름을 발견할 때면 아이들의 필기나 논술 시험지가 하나의 새로운 텍스트처럼 재밌게 읽힌다. 그래서인지 수업 중 낙서를 하는 아이를 봐도 크게 서운하지 않다. 그 시간은 적어도 그 아이에게 어떤 '자기 발산의 시간'이 되었을 테니까.
아이들을 바라보는 이런 나의 시선 때문일까. 언젠가 한 선배 교사가 "선생님은 참 화가 없는 것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의 '화'는 학생의 학습 태도 유무보다는 다른 지점에서 작동하는 듯하다. 나는 아이들의 미숙함이나 산만함보다, 타인에 대한 지속적 존중 없음이나 비열한 이기심을 마주할 때 더 마음이 흔들린다.
이 모든 성찰이 가장 선명해지는 순간은 상담을 할 때다. 나는 상담을 하면서 나오는 주요 키워드를 쓰고 도식을 그리며 내 생각을 함께 대충 끄적여놓는다. 그런데 유독 몇몇 아이들은 상담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낙서 비슷한 그 종이를 사진으로 찍어가곤 했다. 처음에는 왜 그러나 싶었는데, 어느 날 한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이 저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해 주신 걸 기억하고 싶어서요." 심지어 어떤 학생은 내가 끄적인 그 종이를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넣고 자신의 다짐을 덧붙여 놓기도 했다. 그들의 몸짓은 나와의 상담을, 대화의 온기를, 자신을 향한 관심을 어떻게든 붙잡아두고 싶어 하던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나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교직은 수천의 다른 인간을 만나는 특수한 일이다. 동시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만나 성장한다는 가장 보편적인 일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또 한 명의 학생을 통해 내가 잊고 있던 꿈을 떠올리고, 나의 편협함을 깨닫고, 관계의 소중함을 배운다. 가르치는 자에서 배우는 자로. 아이들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이 성찰의 과정이, 내가 교사로서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책을 덮으려 한다. 하지만 나의 관찰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일도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남긴 수많은 흔적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 속에서 어김없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을 본다는 것은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가장 치열한 성찰의 과정임을 알기에. 이 글은 나의 이야기인 동시에, 당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통해 자신을 배우고,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들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