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지나간 자리

by 초연희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본다. 싹이 나고 먼지가 쌓이고 치우고 다시 먼지가 쌓이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큰 흔들림이나 파괴, 붕괴 같은 거대함은 없다. 나는 울지 않은 지 꽤 오랜 날들을 살아왔고, 그때보다 더 건강해졌으며 아프지 않게 되었다. 뉴스도 집중해서 볼 수 있게 되었고 잠도 잘 자고 잘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주

왜 사는지를 잊고 산다.


사랑이나 슬픔이 없는 삶을

그리워할 누군가, 무엇인가가 사라진 삶을 살면서

호흡하고 웃고 먹는 살덩이로 존재한다. 그래서

쓰지 않게 되었고 읽지 않게 되었다.


쓸 마음도 사라졌고 읽는 것도 읽음 안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서 뉴스에 집중하고 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삶은 단순하고 간단해졌고

나는 가벼워지고 이해하기 쉬워졌다.

멍청한 로봇청소기를 매일 작동시키고 수박을 네모로 자를까 세모로 자를까 고민하면서

내 몸의 겉면을 차지하는 살들이 굳어지거나 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내 안의 집착이 흐물 해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집착하지 않게 된 생활을 자축하면서 또 서러워하면서

나는 달리고 스콰트를 하고 땀을 흘린다. 내가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고민한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난감해진다.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문장이 짧아진 것에 대해 당혹해한다. 원래 간결한 글이 좋은 글이 아니었던가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글은 긴 문장들로 채워진 글이었는데, 하며 한숨을 쉰다. 사랑이 있었던 때 나는 쉽게 긴 문장들로 가득한 글을 썼다. 사랑에 대해서 사랑이 있었던 장소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이 있었던 마음에 대해서 쓰면 문장은 길어졌다. 글은 금세 차올랐다. 그리고 어떤 기다림이나 기억들이 서글프지 않았다. 서글픔조차 즐겼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상태와 나이에 대해 감사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과 시절에 대해 나는 이제 전생이나 신화로 치부하려 한다. 한쪽으로 밀어 두고 회색을 덧칠하려 한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연애소설을 읽으며 조금 울거나 사랑에 대한 영화를 보며 약간 쓰라려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생의 사랑을 이어가려 노력할 것이다. 남은 삶의 어느 틈에 사랑이 스며든다면 그건

사랑으로 착각된 어느 이야기일 것이다. 내 이후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미리 내려두는 것은

내 사랑이 지나간 자리를 영원히 비워두고 바람이 불게 하고 먼지게 쌓이게 한다는

다짐이자

패잔병처럼 남은 사랑의 낫지 않은 상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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