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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Jul 09. 2022

열리지 않는 서랍

이삿짐을 들여놓기 전

걸레질이라도 대충 할 생각으로

들어간 원룸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계약할 당시 마지막으로 둘러봤던 때가
고작 한 달 전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남자 혼자 사는 곳 치고는 깔끔하다고 느꼈었다.     


주인으로부터 내가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은 듯하다.     


가스레인지 주변은 

온갖 국물과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역한 냄새가 났고

변기는 
차마 그냥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곰팡이와 물때가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가구가 있었던 바닥은 
덩어리 진 먼지가 굴러다녔고

이삿짐을 옮기면서 찍힌 
다양한 크기와 무늬의 발자국들이

집안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욕이 나오려 했지만

어차피 벽과 천장에 튕겨서

나에게 돌아올 것을 알기에

가슴속으로 삭였다.     


검게 변한 걸레와 물티슈가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웠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청소가 끝나자

이삿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이삿짐을 넣어주시던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학생, 이 붙박이장 서랍 하나가 안 열리는데, 어떻게 할까?”     


“아, 그래요? 나중에 주인아저씨한테 말씀드릴 테니 그냥 두세요.”


크기가 제법 큰 서랍이라서 
나중에 까먹지 말고 수리를 요청하기 위해 

휴대전화 메모장에 기록해 놓았다.     


역시 이사를 끝내고 먹는 

자장면과 탕수육은 

어느 가게에 주문해도 

최소 미슐렝 원 스타 수준이다.     


정리가 대충 끝나자 
주인아저씨에게 전화를 건다.


“맞아요. 
그 서랍 지금까지 고쳐달라고 한 세입자가 

그동안 수두룩 빽빽했는데 

그게 맞춤 붙박이장이라서 
수리가 어렵다더라고. 

그렇다고 몽땅 뜯어내고 새 거로 넣기엔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냥 좀 쓰시면 안 될까?
대신 내가 이야기했나?
그 방 썼던 사람들 하나 같이 
다들 엄청 성공해서 나갔다고.”     


뭐. 서랍 하나 덜 쓴다고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으니 

신경 쓰시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배도 부르고 온몸이 쑤셔서

일찍 잠이나 자려는데

자꾸만 서랍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래, 
나는 포기를 모르는 대한민국의 불꽃 아가씨지!!


내가 가진 유일한 공구인 망치를 찾아들고 

서랍 모서리를 툭툭 쳤다.

꿈쩍도 하지 않자 조금씩 강도를 높였더니 

어느 순간 툭 하고 서랍이 밀려 나왔다.     


그 속에는 하얀 편지 봉투들이 
수북하게 들어차 있었다.

눈대중으로 수백 장은 족히 되어 보였다.


제일 위에 있는 봉투를 들고 

안을 살펴보니 편지 한 장이 손에 잡혔다.     


‘행운의 편지     


지금 이 편지를 받은 당신 바로 앞에 

행운이 다가와 있습니다.

그 행운을 발로 걷어차서 계속 불행하게 살고 싶다면 

그냥 이 편지를 도로 넣으세요.

다만 그 커다란 행운을 당장 잡고 싶다면

아주 작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 함께 있는 다른 봉투에 5만 원짜리 신권을 넣어서......’     


급히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도로 집어넣었다.     


젠장.

도대체 뭐 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쓸데없는 편지를 여기에 보관했던 것일까?     


괜히 애써 열었다는 후회와 함께 서랍을 닫으려다가

다른 봉투 하나만 더 열어보고 싶어졌다.     


이 년의 궁금증은 병이다 병.     


또 거지 같은 편지가 나오겠지 싶어서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살짝 
봉투 입구를 열었는데

그 속에 든 것의 색깔이 조금 이상하다.     


오만 원권 지폐 한 장.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와서 
동작을 재빠르게 만들었다.


봉투 하나를 더 연다.     


오만 원권 지폐 또 한 장.     


미친 듯이, 
아니다 누가 봤으면 분명히 미쳤다고 할 정도로

봉투들을 거의 찢을 것처럼 마구 열었다.     


나머지 봉투에는 전부 오만 원권 지폐가 들어있었다.     


나는 현금과 봉투들을 분류하여 
원룸 바닥에 잘 챙겨놓고 

행운의 편지가 들어있는 봉투와

5만 원권 지폐 한 장만 서랍 속에 남겼다.     


그리고 망치로 두들겨 다시 열리지 않도록 해 놓았다.


뭔가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쌓여있는 현금 다발을 보며 크게 한 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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