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은 완벽했다.
언제까지 나만 영원히 바라봐줄 것 같던 그가
그렇게 훌쩍 떠난 이유를
아직까지 모른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느 하나 흠잡을 때 없었다.
삼 년 가까이 기다렸다.
평생 꿈꿔오던 이상형에 가장 가까웠던 그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기만을.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바보처럼 기다릴 거냐?'
'그렇게 혼자 늙어갈 거냐?'
'나중에 후회해봤자 너만 손해다.'
하는 주변 지인들의 말에
큰 결심을 했다.
새로운 사랑에 도전해 보기로.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괜찮은 남자를 만나리라 믿었건만
번번이 실패를 겪으며 낙담을 하던 와중에
방법을 한 번 바꿔보기로 했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 주요 항목을 확인하고 간략하게 정리한다.
이럴 때는 내 꼼꼼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첫사랑의 그를 처음 만난 날
1. 그가 먼저 도착했는지 내가 먼저 도착했는지
2. 그가 입었던 상의의 색깔은 무엇이었는지
3. 내가 주문한 커피에 들어있던 얼음의 개수가 몇 개였는지
4. 식당에 들어갈 때 그가 먼저 들어갔는지 내가 먼저 들어갔는지
5. 음식 주문을 받은 사람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6.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좌석 번호가 홀수였는지 짝수였는지
7. 술집으로 함께 가면서 주황색 버스를 몇 대나 봤는지
8. 첫 잔을 내가 먼저 따랐는지 그가 먼저 따랐는지
9. 집에 돌아갈 때 내가 탄 택시 번호 끝자리가 뭐였는지.
운명과 같은 사랑을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날과 똑같은 조건이어야만 한다.
젠장.
다 실패다.
고작 아홉 개밖에 되지 않는데도
모두 만족시킨 상대가 없다.
7번까지 간 게 최고 기록이다.
한두 개를 빼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렇게 나약한 마음을 가지고
쉽게 타협을 한다면
결코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부딪혔다.
소개팅 횟수가
10번, 20번, 30번을 넘어가면서
주선해주는 사람들이 지쳐갔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이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물의 기운이 우리와 조화를 맞춰주는 순간
바로 그때 생기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소개팅에 나온 남자들은 대부분 정말 훌륭했다.
매너도 좋고 인상도 좋고 직업도 훌륭했으며
무엇보다 나에게 호감을 가진 티를 팍팍 냈다.
나도 몇몇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더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단호하게 포기하고 잊어버렸다.
어쩌겠냐.
내 운명이 아닌 것을.
드디어
48번째 남성이 모든 조건을 만족시켰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외모도, 성격도, 직업도, 말투도, 인성도, 목소리도 아니었지만
다 상관없다.
앞으로 사랑에 빠지고 나면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애프터 신청이 없어서 초조하다.
하지만 일단 기다려본다.
드디어 연락이 왔다.
‘미안하지만 저와는 잘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보다 좋은 남자 만나시길 바랍니다.’
허걱.
그럴 리가 없는데.
답장을 했다.
나는 당신이 싫지 않으니
몇 번 더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묵묵부답이다.
처음 만난 그날의 내 행동 때문인가 싶어
사과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날 당신에게 집중하지 못한 것은 정말 미안해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해결되었으니 오롯이 당신을 알고 싶네요.’
답장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 사랑을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내 매력을 보여줄 기회를 딱 한 번만 준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텐데.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잠깐 선잠을 자던 중
메시지 소리에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사실 제가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
처음 상대방을 만나는 자리에서
중간에 배가 아파 화장실에 다녀오면
아무리 깊은 사랑에 빠졌더라도
꼭 끝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이해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급히 다이어리를 찾아 펼친다.
완벽했던 첫사랑의 그 남자도
소개팅 중간에 갑자기 배가 아프다면서 화장실에 다녀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