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잘 놀라지 않는 편입니다. 예전에 친한 후배가 크게 넘어져서 이가 나갔을 때도 태연하게 지혈을 해 주며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주변에 있었던 다른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혹시 사이코패스 아니냐고. 너무 대수롭지 않게 처치를 했다면서.
그런 저에게 어제 오전, 정말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머리를 감고 말리기 위해서 드라이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갑자지 ‘지지직’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펑’하며 전원이 꺼지는 겁니다. 진짜 태어나서 그렇게 놀란 적이 몇 번 없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드라이기를 바닥에 던졌는데 영화에서나 볼 법한 푸르스름한 불꽃이 연이어 이는 겁니다. 급히 전원 코드를 뽑았더니 발작이 멈추고 회색 연기가 살짝 피어오르더니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죽을 뻔한 건가?’
물론 과한 해석이겠지만, 젖은 머리를 타고 스파크가 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소연하거나 같이 놀라 줄 사람도 없이 뒷수습을 하는데 아내가 몇 달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드라이기 오래 썼는데 다이x으로 바꾸면 안 될까?”
저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죠.
“드라이기 있잖아. 있는데 뭘 또 사.”
그렇게 아내의 말을 일축해 버렸죠.
그때 바꿨어야 했나 보다 하면서 소파에 앉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데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텔레비전(17년을 사용하고 최근에 고장이 났습니다.)이 떡하니 보입니다. 흠....... 뭔가 찜찜한 기운을 애써 털어내며 서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아이와 아내의 설전이 안방 화장실에서 거실 밖까지 흘러나옵니다. 10분, 20분 너무 길어진다 싶어서 들어가 봤더니 아이는 울고 있고 아내는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더군요.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자기 전에 껴야 하는 드림렌즈 한쪽을 잃어버렸다고 하더군요. 렌즈를 닦다가 세면대 물 빠지는 구멍에 들어가 버린 것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가격이 가격이다 보니 아내가 흥분할 만도 합니다. (한쪽 당 50만 원입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이제 의심은 확신이 되어갑니다. 텔레비전, 드라이기, 드림렌즈. 불운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예상치 못했던 사고와 연이은 지출의 연속. 불운이 이어지자 다음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불안이 고개를 들더군요.
뒤숭숭한 꿈까지 꾸며 오늘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래도 아침이 되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더군요. 그리고 ‘전화위복’, ‘새옹지마’,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를 돼내는 중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기 위해서 요 며칠간 좋지 않은 일이 생겼거니 여기면서요.
그러고 보니 불운과 행운의 기준이 궁금해집니다. 사실 텔레비전이나 드라이기는 수명이 다한 것이고, 아이는 그저 잠깐의 실수를 했을 뿐입니다. 그걸 운과 연계시킬 근거는 없습니다.
아마도 불운과 행운은 예상이나 기대를 기준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지출은 불운이고, 예상했던 지출과 이득은 일상이고, 예상치 못했던 이득은 행운이 되겠네요.
아무튼 예상치 못했던 지출이 있을 예정이니 예상치 못했던 수입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좋아하는 ‘균형’이 맞춰질 테니까요. 아니면 더 이상 갑작스러운 지출이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만 해도 만족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