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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y 25. 2022

계절이 불러 나가는 길에

  계절은 무심하게도 다시 꽃을 피웠다.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었던 메마른 땅이 촉촉하게 봄비를 머금고 흙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중창에다가 커튼까지 쳐 놓았는데도 어딘가 내가 모르는 빈틈이 있나 보다. 오직 흙냄새만의 유혹이었다면 그럭저럭 참아낼 수 있었지 모른다. 하지만 꽃이라니. 새로 핀 꽃이라니.     


  옷장을 열어 삐딱하게 그 안을 들여다본다.

몇 벌 없는 겉옷과 어둠 사이에 색다른 구분이 없다. 얼마 만에 하는 외출인데 조금은 산뜻해지고 싶다. 딱히 봄옷이랄 건 없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계절과 꽃에게 덜 미안할 그런 옷이 한 벌 정도는 눈에 띄리라.     


  한참 동안 옷장을 뒤적거린다.

어쩌면 옷을 핑계로 그냥 집에서 빈둥거리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장 구석에 있던 처박혀 있던 노란색 티셔츠와 갈색 바지가 개나리처럼 쑥 튀어 올랐다. 옷장에서 자랐을 리는 만무하고 곰곰이 녀석들의 출처를 떠올려본다.     


  어버이날 선물이었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집에 왔던 일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벌써 5년도 넘었구나. 옷의 천이 무척 부드럽고, 디자인은 그 당시 유행을 따라 세련된 실루엣을 가지고 있었다. 비싸지 않다고 했지만 얼핏 봐도 가격이 제법 나갈 것 같았다. 그래서 옷장 구석에 소중하게 묻혀있었구나.     


  '아끼면 똥이 된다.'라고 손녀가 말했었다.

자기가 엄마, 아빠와 함께 골랐으니 매일매일 입고 다니란다. 하지만 허투루 입고 다닐 수는 없었다. 설령 똥이 된다고 해도 아끼고 아끼면서 소중하게 입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작업복을 입고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이런 옷에 흙먼지를 묻히거나, 실수로 찢어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옷을 들고 눈물을 참는다.

소파에 앉아서 입어보니 다행히 옷은 그럭저럭 맞는다. 살이 찌지는 않았나 보다. 나가기 전에 거울을 본다. 수염이 좀 자랐지만 괜찮다. 왜 정작 필요하지도 않은 수염은 잘라도 잘라도 이리도 잘 자라는지 살짝 울화가 치민다     


  현관문에서 신발이 이미 가지런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와서 미안하지만 선뜻 신발 신기가 싫어진다. 나가려던 발이 외롭단다. 잘 달래 보려는데 자꾸만 떼를 쓴다. 그래서 이번에는 욕을 곁들여 협박을 한다. ‘발 놈아. 이러면 앞으로 영영 못 나갈지도 몰라.’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니 겁을 먹었는지 펄럭이는 바짓단 속으로 숨어버린다.     

 

  잠시 시간을 주기로 했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온 시간이 얼마인데, 고작 잠깐을 못 기다려 주겠는가.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니까. 소파에 다시 앉아 빈 종이에 펜을 끄적인다.          




계절이 불러 나가는 길에

발목이 펄럭이는 헌 옷을 꺼내봅니다.

기억의 악취 스며든 바짓단 속 

충혈된 눈동자가 삐죽 눈치를 봅니다.     


신발은 가지런히 발들을 기다리는데

나가려는 발은 외롭습니다.

이런 신발

뚫린 입이 뚫린 귀들과

티격태격 싸움을 벌입니다.     


새로 온 계절은 자유롭지만

자유로운 계절은 새롭지 않습니다.

낡은 시간

깨끗한 신발 한쪽

더러워진 입과 귀는 내버려 두고

하얀 마스크만 챙겨 길을 나섭니다. 


계절이 불러 나가는 길에

외다리 사내가 하루를 서성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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