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학

by 김재호

선물.

그가 나를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했다는 선물은 긴 시간 동안 내 방 한편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남들은 평생 한 번도 겪기 힘든 험난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어쩌면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저 투명한 유리병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도 나는 수백 마리의 종이학의 시선을 느끼며 하루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다른 것은 없다. 사나운 운명은 쉬지 않고 내 다리를 잡아당겼고, 잿빛색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건져 올려주는 것은 종이학들의 작은 날갯짓들뿐이다.


비록 그는 매몰차게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를 생각하면서 접었다는 형형색색의 종이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보물 1호이자 수호신이다. 비록 세월이 흐르면서 살짝 색이 변하긴 했지만 시간과 시각을 왜곡한 듯 오히려 깊은 빛을 더해간다.


부유하고 자상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자라던 삶이 모진 바람과 거센 빗줄기에 쑥대밭이 되었지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주변에 남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누굴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것 역시 내 자리만 묵묵히 지키면 된다는 뜻이다. 가끔 맞서지 못할 정도의 외로움이 밀려오지만 종이학을 하나씩 어루만지다 보면 금방 잔잔한 호수를 떠다니는 한 마리 물새가 된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는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나를 떠나 심적 고통이 심해서였을까?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사기죄라니. 매 순간 본인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 주던 그런 사람이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가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 분명 사법 기관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사랑을 보답하기 위해 없는 잔고를 털어가며 그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 물론 터무니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조금은 편하니까. 내일은 그를 만나러 갈 예정이다. 흉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편지를 받고 큰 용기를 냈다. 나에게 꼭 할 말이 있다는데 설레서 잠을 이룰 수 없다.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어쩌지? 십수 년이 지났는데도 나를 잊지 못했다고 하면 내 심장은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악몽이 나를 괴롭혔다. 유리병을 깨고 나온 종이학들이 뾰족한 부리로 내 눈과 내 심장과 내 다리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온 세상이 붉은 피로 뒤덮였고 끔찍한 절망 속에서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머릿속으로 되뇌기만 했다. 유일한 내편인 종이학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으니까.


잠에서 깨자마자 종이학이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 온몸은 땀냄새가 풀풀 풍겼고 손은 벌벌 떨렸다. 그러다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바닥에는 유리조각과 종이학들이 기이한 모양으로 흩어졌다. 허겁지겁 종이학들을 주워 모으려다 손바닥이 찢어졌고 하얀 종이학 하나가 피로 물들어 갔다. 그냥 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종이학을 펼쳤는데 그 안에 깨알 같은 것들이 적혀있다. 안경. 안경이 어디 있더라.


안경을 쓰자 글자들이 또렷이 보였다.


"개새끼. 이번에는 또 누굴 꼬시려고 종이학을 접으래."


떨리는 손으로 다른 종이학도 펼친다. 중간중간 찢어지고 피가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싸움 좀 잘한다고 매번 우리한테 이런 짓을 시키다니."


"그나저나 어떤 멍청한 년은 이거 받고 좋다고 웃겠지."


"둘 다 저주나 받아서 평생 불쌍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도대체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힘들어 죽겠다. 그래도 처맞지 않으려면 접어야겠지."


"이 종이학에 우리의 복수가 깃들면 좋겠다. 제발."


종이학이 하나둘 부스럭거리며 떠오르더니 내 주위를 어지럽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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