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젖은 나뭇잎 사이로 번지는 가로등 불빛이 연구실 안까지 스며들었다.
수현은 손에 쥔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 숫자에도 신의 뜻이 담겨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정말 있나요?"
최영도 교수는 책상에 놓인 고서를 천천히 덮었다.
가죽 표지가 오래된 시간처럼 바스락거렸다.
"있죠. 아주 오래전부터요. 사람들은 숫자를 단순한 계산 도구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신과 대화하는 수단으로 여겼거든요."
수현은 놀란 눈으로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요? 숫자에 그런 의미까지 있었나요?"
최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예, 고대 바빌로니아부터 피타고라스 학파, 유대 신비주의까지.
모두 숫자에 어떤 '신성함'을 부여했어요."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세상의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다고 믿었던 거죠.
그 질서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게 숫자라고 생각한 겁니다."
사람은 이유 없이 숫자에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나이를 세고, 날짜를 기억하고, 주소를 외운다.
심지어 휴대폰 번호나 생일에도 어떤 운명이 깃들어 있다고 느낀다.
숫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그 안에는 질서, 예측, 심지어 위안과 신념까지 담겨 있다.
고대인들은 이 점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다.
별의 움직임을 숫자로 기록하고, 농경의 시기를 숫자로 맞췄다.
사람의 탄생과 죽음마저 숫자로 설명하려 했다.
수는 곧 우주의 언어였고, 신의 목소리였다.
"교수님, 그럼 수는 인간이 만든 건가요?
아니면... 원래 세상에 존재했던 건가요?"
수현의 질문에 최 교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질문이에요.
사실 그건 지금도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죠.
수는 발견된 걸까요, 아니면 발명된 걸까요?"
"발견과 발명이라... 전혀 다르게 들리네요."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요.
수는 이 세상 너머, 이데아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고.
우리는 그걸 '발견'하는 거라고요. 마치 신이 만든 설계도를 찾아내듯이."
수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수학자는 설계도를 해석하는 사람인 셈이네요."
최 교수는 잠시 책장 위를 올려다보았다.
먼지가 쌓인 수학, 철학 책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숫자가 신의 언어가 된다는 생각은 단순한 신비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갈망해 온 기록이다.
고대의 신탁은 불확실한 미래를 언어로 전달했지만,
수는 더 냉정하고 확실하게 세계를 묘사했다.
그 점에서 수는 신보다 신뢰받는 언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숫자의 세계는 설명할수록 더 신비로워졌다.
모든 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 계산 너머의 것들이 더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수현은 노트북을 열며 중얼거렸다.
"숫자에 신의 뜻이 있다면... 그걸 해석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겠죠."
최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수는 침묵하죠. 하지만 사람은 그 침묵을 해석하려 애쓰는 존재예요.
그게 인간의 본능이고,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죠."
연구실 바깥에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 언어가 숫자인 줄 미처 몰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