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과 눈치 사이, 나의 개성은 사치인가?

관료주의 조직에서 다양성과 목소리에 대하여

by 윤수호

“당신은 지금 어떠한 상태인가?”

이 글의 끝이 아니라, 시작은 이 질문에서부터였다.

관료조직에 몸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곳엔 언제나 공기가 흐른다.
'공기 파악'이라는 이름의 눈치, '상명하복'이라는 이름의 체면,

그리고 ‘괜찮아, 익숙해지면 편해’라는 자기 위로의 공기.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사라진다.


획일성의 그림자 속, 동조의 자동화


막스 베버는 현대사회를 ‘철의 우리(Iron Cage)’라 불렀다.
그는 관료제를 효율성의 상징으로 보았지만,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만든 구조에 갇혀 비인간화되는 과정’이라 경고했다.

획일적인 절차와 권한의 집중은 의사결정의 속도와 일관성을 보장한다.
그러나 그 속도와 일관성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가치일까?

상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에선 “좋은 의견입니다”라 말하지만
속으로는 ‘이게 맞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경험,
우리는 이미 수없이 겪어왔다.

문제는, 그런 의심조차 점차 사라진다는 데 있다.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보다는,
‘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확신이 더 강한 공간에서
다름은 곧 위험이 되고,
침묵은 미덕이 되기 때문이다.




“나를 지운다는 건, 정말 안전한 일일까?”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은 자유를 얻었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는 일을 두려워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라는 책임에서 도망친다.”

이 도피는 오늘날 관료조직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양성은 ‘슬로건’으로 존재하지만,
정작 회의실 안의 공기는 여전히 획일적이다.
다른 의견은 회피되고, 문제 제기는 불편함으로 치부된다.

누군가는 말한다.
“조직은 원래 그런 거야. 조금만 참고 견디면 돼.”
하지만 정말 그럴까?
‘참음’이 누적되면 조직은 안정화되는 걸까?
컵의 표면장력처럼, 어느 순간 작은 한 방울이 넘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



MZ의 등장, 그리고 얼리퇴사의 이유


2025년, 우리는 MZ세대의 ‘다름’을 너무 자주 말한다.
그들은 질문한다.
“왜요?”
그리고,
“그게 정말 최선인가요?”

하지만 질문이 많아질수록
그들은 더 빨리 떠난다.

얼리퇴사의 진짜 이유는 단순한 개인기호가 아니다.
‘내가 무색해지는 환경’에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누구도 ‘스스로를 지워가며’ 오래 버틸 수는 없다.



조직문화는 다수의 선택, 그러나 다수만이 옳은가?


조직의 문화는 구성원 다수의 사고 결과다.
하지만 그 ‘다수’가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찰스 핸디는 이렇게 말한다.

“조직은 인간의 집단이 아니라, 인간성의 집합이 되어야 한다.”

그 말처럼 조직은 ‘질서’만이 아니라, ‘온도’도 필요하다.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
이것이 곧 진짜 조직의 안전판이며 회복탄력성이다.



다시, 질문한다

그래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어떠한 상태인가?”


의견을 삼키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답게 말하고 있는가?


이 글은 정답이 아니다.

단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익숙해진 공기에

조금 다른 바람을 불어넣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관료주의는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다움은 지켜야 한다.”
– 윤수호, 어느 정훈장교의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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