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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의자 Dec 09. 2022

#26. 집무실 내 예문관(藝文館)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예문관(藝文館): 조선시대에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조 상무가 직접 추노꾼 노릇을 하며 일단락시킨 연말 인사로 사업부에는 꽤 많은 인력이 충원되었다. 그리고 그 인원 중 기획팀으로도 2명이 보강되었다. 자연스레 올해와는 다른 업무분장이 필요했지만, 연말이기도 하고 내년을 준비하며 잠시 쉬어가는 시기였기에 어느 누구도 팀 내 업무분장 변화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종무식을 하루 앞두고 조 상무는 직접 내년도 기획팀 업무분장의 아이디어를 주겠다며, 팀원들을 본인 방 회의실로 소집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올해도 마무리였기에 다들 별다른 거리낌 없이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반적인 팀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법한 업무분장을 강요받게 되었다.




12월 종무식 D-1 오전 10시 (조상무 방 회의실)

"올해 처음 저와 손발을 맞춘다고 기획팀에서 1년 내 고생이 많았습니다. 다행히 조직개편이 잘 진행돼서 새로운 인력도 2명 보강되었고, 이제는 좀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업무를 나눠서 내년을 운영했으면 합니다. 업무분장은 당연히 내년 초에 하면 되리라 생각하고 별 고민들이 없을 거 같아 내가 먼저 고민한 부분을 전달할 테니 최대한 반영해서 내년을 준비해주세요."


조 상무는 새롭게 보강된 인원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업무 구분을 세분화하자고 주문했다. 일단 실제적으로 업무에 관해 1도 관여가 없던 이 팀장은 대외업무 담당(이라 쓰고 의전 담당이라 읽힘)을 하고, 팀 업무를 거의 리딩 하던 유 차장님이 사업부 기획파트 총괄업무, 그리고 내가 페어로 서포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새롭게 합류한 인원은 사업부 내 인사와 경영관리 지원을 각각 나눠서 담당하게 되었다. 손도 빠르고 보고서 작성 스킬도 좋은 남대리는 사업부 회의체 서기관 업무를 맡게 되었다. 평소 거의 모든 회의에 참석해서 속기사처럼 빠르게 회의록을 정리하던 남대리였기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업무 분장을 수긍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가 참석하는 모든 회의에 배석하고, 주문 사항을 빠짐없이 기록해 전달하려면 지금 위치에서는 번거로움이 많습니다. 종무식 이후 사무실 레이아웃 변경 공사할 때 얘기해 둘 테니 제 방 회의실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세요."


내년도 모든 회의체에 참석하고, 조 상무가 주문하는 다양한 요구사항들을 빠르게 적어 현업에 전달하기 위해 조 상무 집무실 내 회의실로 자리를 옮길 것을 주문했다. 처음엔 모두가 농담이라 여겨 별 반응이 없었지만, 조 상무는 다시 한번 진지하게 자리 변경을 지시했다.


조선시대 임금의 말이나 명령을 적어 교지를 내리던 예문관도 아니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다들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조 상무는 남 대리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밀어붙일 기세였다. 그 순간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유 차장님이 기획팀 내 업무적인 소통이 어려울 수 있으니, 자리 변경은 한번 더 생각해주셨으면 한다라고 제지했다. 


팀 내 의견과 남 대리의 불편한 표정을 감지한 조 상무는 그럼 1월 중 옮기는 걸로 생각하고 업무를 진행하라고 한발 물러서긴 했으나, 내년 초에는 조 상무 집무실 안으로 남 대리 자리가 옮겨질 처지였다. 


"사업부장님, 남 대리랑 얘기해서 내년 1월 중 자리 옮기는 방향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남 대리 손이 워낙 빠르니 내년도 다양한 논의 사항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현업에 전달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남 대리?!"


조 상무에게 그 짧은 순간 한번 더 어필하고자 이 팀장은 남 대리의 자리이동을 스스로 기정사실화 시켰다. 


그리고 그날 이후, 팀 내 업무를 하며 남 대리가 웃거나 밝은 표정을 짓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누가 봐도 부당하고 불편한 지시였지만 팀 내 리더는 그걸 막아주기는 커녕,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로 치부해버렸기에 남 대리가 느낀 배신감과 상실감은 더 컸을 터였다.




스스로를 왕이 될 상으로 여겼던 조 상무는 본인의 별도 서기관을 두고 싶어 했다. 그리고 1월이면 그 서기관이 본인의 집무실 안에 들어오리라 기대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의 업무 분장이 시발점이 되어, 남 대리는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6년 차 경력의 대리급 인재는 어느 회사나 탐내는 인력이었고,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남 대리는 퇴직 의사를 밝혔다. 부당한 업무분장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후 흔히들 말하는 노비 탈출의 출발 신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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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Photo by Carl Kh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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