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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의자 Dec 06. 2022

#24. 회장님 보고를 준비하는 법(a.k.a장학퀴즈)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회사 내에도 정보가 권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구성원과의 투명하고 진솔한 소통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지만, 여전히 많은 리더들은 정보의 통제를 통해 발생하는 격차를 권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소수에게만 공개된 정보는 결국 소수만을 위한 권력으로 이용된다.


본인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신규 사업을 추진한다는 이유로 조 상무가 그룹 회장님 보고에 참석하게 되면서 그는 이 정보의 격차를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다. 새로운 사업이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정보가 업데이트되고 진행상황이 달라진다. CEO에게 사업보고를 한 뒤, 회사 전체의 방향성을 그룹 회장님에게 보고 드리기까지의 시간차는 3주 남짓. 그 간의 진행상황 등 변경된 정보들은 오롯이 조 상무 본인만을 위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11월 2월 회장님 보고 D-1 (조상무 방 회의실)

"내일 보고에는 CEO, CFO, CHO만 그룹 회장님과 대면보고로 참석하고, 나머지 참석자는 본사에서 화상회의로 연결 예정입니다. 우리 쪽에서 준비한 유첨 자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프린트해서 태그 달아놓으세요. 본부 전략팀으로는 해당 자료 보내지 않아도 됩니다. 질문이 나오거나 CEO께서 답변이 막히면 제가 직접 답변하겠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며 대면 보고 인원은 최소화되었고, 조 상무는 대회의실에서 화상으로 참석하는 것으로 일정이 변경되었다. 그 덕에 조 상무는 화상회의 화면 앵글 밖에서 산더미 같이 유첨 자료를 프린트하여 대기하고 있을 것을 주문했고, 기획팀원들도 화면 앵글 밖 책상에 앉아 보고 내 대기를 하게 되었다. 


목차별로 태그가 달려 준비된 방대한 양의 자료들은 회의 참석자 누구에게도 공유되지 않았고, 조 상무 본인만을 위한 무기로 활용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만 볼 수 있는 최신 자료들도 중무장한 채 의기양양하게 회의에 참석했다. 


11월 3일 회장님 보고 D-Day (화상연결 대회의실)

"기존 사업은 수익성 중심의 경영체제로 전환하여 어려운 시장환경임에도 고부가 가치 제품 위주로 판매를 확대하고, 불요불급한 비용들 절감을 통해 단순 외형확대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한 해로 내년을 준비하겠습니다. 올해부터 새롭게 추진 중인 B2C 유통사업은 새로운 제품을 기반으로 전국망 유통을 빠르게 확보하여 내년도 본격적인 사업 확대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 한 해입니다. 내년도 사업 확대를 위한... (생략)"


CEO가 준비했던 사업 전반에 대한 올해의 성과와 내년도 계획 보고를 마친 뒤, 본격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주로 신규 추진 중인 B2C 유통 사업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고, 날카롭고 디테일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대면보고 중인 C레벨에서 답변이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조 상무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마치 부저를 누르고 "정답!"을 외치듯이.


"(마이크 버튼을 누르며) 회장님, 조 상무입니다. 해당 질문에는 제가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판매 중인 제품들은 9월 시즌에 맞춰 1차적인 라인업이 완비된 상태이고, 내년 3월 시즌에 대비하여 추가적인 제품 라인업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제품에 대한 고객들의 전반적인 평가는... (생략)"


제품/유통/시장 반응 등 사업과 현장에 관한 디테일한 정보들은 조 상무만 갖고 있던 유첨 자료에 전부 담겨 있었기에 조 상무 외에는 아무도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면보고 자리에서 이어진 질의응답에 조 상무가 마이크 버튼을 눌러가며 대답하는 '장학퀴즈'와 같은 상황이 30여 분간 연출되었다.


회장님은 마지막 모두발언에서 CEO가 신사업 리더를 잘 선임한 것 같다며, 필요원 지원들을 아낌없이 잘해달라는 당부의 말씀으로 보고의 끝맺음을 했다. 그리고 그 모두발언을 들은 조 상무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승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대면회의 중인 C레벨 중 어느 누구도 그 표정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광도 팔아본 놈이 판다'고 그는 누구보다 광팔이에 능했고, 이를 위한 전략과 전술도 탁월했다. 그렇게 CEO를 넘어 홀로 빛난 사업보고가 끝나자, 그는 누구보다 빨리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제조/유통업의 근간은 결국 제품/유통/사람으로 귀결되고, 그는 누구보다 사람 욕심이 많았다. 


그렇게 그를 위한 새로운 노예 선별 작업이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이전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https://brunch.co.kr/brunchbook/sociopath


이미지 출처:Photo by Carlos Arthur M.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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