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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의자 Dec 02. 2022

#23. CEO를 관리했던 남자.

(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자기가 믿고 따르는 윗사람이라면 언제나 깍듯이 모시는 남자가 있었다. 누군가는 너무 심한 의전이라고 뒷말이 무성했지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그렇게 성심성의껏 윗사람을 모셨다. 그리고 그렇게 모시는 아랫사람을 윗사람 또한 언제나 최우선으로 챙겼다. 그 둘은 함께 높은 자리로 올라갔고,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 같은 관계였다.




조 상무 또한 깍듯하게 CEO를 모셨다. 간혹 무리한 숙제인 것처럼 보이는 지시들도 군말 없이 최선을 다해 수행했고,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 독하게 아랫사람들을 채근하고 질책했다. 조 상무는 그렇게 성과를 만들어 본인을 빛냄과 동시에 CEO에겐 보이기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주었다. 사업보고 이후, 술에 취해 조 상무가 무심코 본심을 내비치기 전까지는 그 둘은 그렇게 영원히 함께할 것 같은 돈독한 관계로 보였다.


사업보고 다음날 오전 10시

"기획팀장, 지금 사업부 내 리더들을 전부 컨퍼런스 룸으로 소집해주세요. 어제 CEO께 드렸던 사업보고 내용을 공유하고,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얘기하고자 합니다. 11시부터 짧게 이야기하고 다 같이 곰탕 한 그릇 하러 갑시다."


"네, 11시 전에 사업부 내 리더들 전부 소집하고 말씀 드겠습니다."


어제의 거나한 술자리 여파로 아직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술냄새를 풍기던 조 상무는 아침부터 사업부 내 리더들을 소집했다. 곰탕으로 해장하기 전 또 일장연설을 하려는 게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현업이 바쁘다고 핑계 대며 빠질 수 있는 배포 있는 리더와 기획팀원은 없었다.


10월 16일 오전 11시 (컨퍼런스 룸)

"자, 어제 CEO께는 우리 사업부가 그리는 청사진에 대해 소상히 설명드렸고, 그렇게 잘 추진해보라는 확답도 받아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경영진들도 물심양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기에 이제 우리 계획대로 하나의 회사를 세운다는 각오로 실행만 하면 됩니다... (중략)"


아직 술기운이 많이 남아 있는 듯한 조 상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장연설을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꿈 이야기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 사업부가 우량한 유통을 전국망에 촘촘하게 확보하고 새로운 유통회사로 독립하는 것입니다. 그 초석이 바로 매출 5,000억입니다. 5,000억이면 가능합니다. 예전에 제가 경영관리를 하던 시절, 지금의 현 CEO는 그저 장돌뱅이 영업사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관리하던 제가(!!) 이제는 탄탄한 유통 사업부를 넘어, 유통회사의 대표가 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장돌뱅이 영업사원이 CEO를 하는 시대에 저는 더 자신이 생겼습니다. 여기 계신 리더분들은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그러면 기획팀장은 기획 임원이 될 것이고, 각 현업의 리더들은 그 윗자리에서 임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만들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새로운 유통회사의 대표가 되는 그날까지 여기 계신 분들은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 첫 시작이 될 오늘은 제가 처음 이곳에 왔던 그날처럼 곰탕 한 그릇으로 소박하게 시작하겠습니다. 하지만, 3년 뒤에는 더 성대한 자리에서 좋은 음식으로 우리의 성과를 자축하겠습니다. 자, 이제 정리하고 다 같이 곰탕 한 그릇 먹으러 갑시다!"


조 상무의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일장연설에 아무도 호응을 하지 못한 채 그저 평소처럼 다 같이 곰탕 집으로 끌려갈 뿐이었다. 누군가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헛웃음을 짓거나, 누군가는 '저 사람을 믿고 따라봐야겠다'라는 결심을 세우는 등 서로 다른 생각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곰탕집에서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참석자는 아무도 없었다.




말을 하다 보면 스스로 그 말에 심취하거나 흥분하여 본의 아니게 본심을 말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날은 조 상무가 현 CEO를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자신이 꿈꾸는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말한 날이었다.


'내가 CEO를 관리했던 남자'라는 자신감, 그리고 '나 또한 대표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오만함은 이후에 이어지는 정기/비정기적인 보고에서 은연중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현 CEO를 따르는 자와 조 상무를 따르는 자로 사업부의 리더들은 패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업보고를 기점으로 '믿는 놈'과 '믿는 놈의 발등을 찍을 놈'의 소리 없는 싸움은 시작되었다.



이전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https://brunch.co.kr/brunchbook/sociopath

      

이미지 출처:Photo by JESHOOTS.CO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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