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라면 임원 방에 들어가는 것과 임원과 함께하는 회의를 되도록 피하고 싶어 한다. 아무리 좋은 리더십을 갖고 있는 임원이어도 어쨌든 윗사람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하직원에게는 불편함으로 먼저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자리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오히려 본인을 돋보이게 하는 자리로 활용하는 이들도 간혹 있다. 그냥 그들은 체질이다. 하지만 그 임원이 조 상무라면 아마 그러한 체질인 이들도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대표님 보고까지 4일을 남겨두고 우리 팀은 그 불편한 자리를 매일 오전/오후/저녁까지 함께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현실세계에도 시간과 정신의 방이 있다면, 우리가 반감금상태로 지내고 있는 지금의 조 상무 방 회의실이 그곳일 것이다.
10월 12일 오전 8시 조 상무 방 회의실(시간과 정신의 방)
"다음! 다음! 지금 당신들은 자료를 벌려 놓을 줄만 알지, 줄이는 건 할 줄 모르나? 이제 3일 뒤야 이 사람들아. 150Page로 늘려놓은 걸 이제는 수습하라니까? 이걸 내가 다 확인하며 줄일까? 내가 임원까지 달고서도 이걸 하나하나 확인하며 가이드를 해줘야 하나?"
5,000억짜리 사업을 만들기 위한 제품 - 유통 - 물류 - 서비스 - 인적 자원에 대해 하나하나 꼼꼼하게 자료를 만들라는 지시에 현업 리더들과 3일 밤낮으로 소설을 써가며 만들어 낸 자료가 150Page 분량에 달한다. 400억짜리 현실에서 5,000억의 청사진으로 점프업을 하려니 부족한 것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새로 회사를 만들어야 할 수준이었다.
차라리 회사에 여유자금이 있다면 그냥 경쟁사를 M&A 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한 소설이지만, 일단 조 상무는 이 소설의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본인이 레이저 포인트를 들고 직접 한 땀 한 땀 보고서의 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10월 12일 오후 6시 조 상무 방 회의실
"날려, 날려, 뒷페이지도 서비스 관련 페이지는 쭉 날리고, 인력 충원부터 그 뒤쪽 숫자까지 50페이지는 전부 유첨으로 넘기고, 다시 처음부터 봅시다."
조 상무의 지시로 한 땀 한 땀 그려진 자료들은 그렇게 대부분 난도질당하거나 유첨으로 추방당하기 일 쑤 였다. 열과 성을 다해 열심히 썼지만 조 상무의 눈 흘김 몇 초 만에 버려질 확률이 높은 페이퍼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울 또 다른 페이퍼가 쓰여질 뿐이다. 이제 이틀만 더 버티면 어떻게든 되겠지.
어느덧 보고서의 퀄리티는 포기한 채 15일 오전이 밝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버티기 모드에 들어갔다.
10월 13일 오후 2시 조 상무 방 회의실
"기획팀장, 당신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그럴 거면 그냥 머리와 함께 자리도 내려놔. 이틀 뒤면 보고인데 지금 이 수준으로 내가 보고가 가능하겠나? 내 스탭이라는 사람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되나? 당장 나가서 방금 말한 사항들 수정해와!! 6시에 다시 봅시다!"
보고가 가까워오자 극도로 예민해진 조 상무는 아침 8시, 점심 먹고 2시, 그리고 퇴근 전 6시 하루 3번 본인의 방에서 하는 말이 각기 다 다르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 변죽에 맞춰 보고서를 수정하고, 욕먹고 또다시 수정하고의 반복이다. 뇌는 내려놓고 그저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생각대로 이제는 추상화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대충 하루 반나절 남은 상황.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상대적임을 뼈저리게 느끼며 여전히 버티기 모드다.
10월 14일 오후 6시 조 상무 방 회의실
"일단 이 정도면 됐습니다. 나머지는 내가 말로 설명할 테니 내일 보고에 유첨 페이지들은 다 빼고 본부 전략팀에 전달하세요. 그건 우리만 보면 될 자료들입니다. 외부에는 공유하지 마세요. 이 팀장, 갑시다. 내일 출정을 앞두고 가볍게 한잔 하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오랜만에 『사업부장-기획팀장』세트는 함께 퇴근했다. 출정을 앞둔 장수의 심정으로 한 잔 하러 사라지는 그 둘을 멍하게 바라볼 뿐 팀원 중 어느 누구도 일어나서 퇴근할 생각을 못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얗게 불태워진 팀원들은 그렇게 멍하니 한동안 자리에 앉아있다 하나둘 조용히 집으로 사라졌다.
보고의 날 아침이 밝았다. 언제나처럼 조 상무는 한껏 여유롭게 대 회의실로 입장했고, 뒤에서 그의 무대를 백업해야 하는 이 팀장만이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뒤따라 들어왔다. 그가 꿈꾸었던 5,000억짜리 광이 여러 경영진들 앞에 첫 선을 보이는 날이다.
광을 팔려는 자와 이를 견제하려는 자들의 90분간 치열한 눈치게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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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Photo by Hasan Almasi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