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 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연례행사 중 가장 큰 행사인 사업보고가 끝나고 나면, 으레 대부분의 조직은 내년 계획을 준비하며 조직 개편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후, 11월 말 대표이사/임원 인사를 시작으로 조직별 리더, 팀원 순으로 인사 발령이 확정되고, 한 해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다.
성과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욕심이 많은 조 상무는 11월 초 회장님에 대한 회사의 사업보고가 끝나자마자 쉴 틈 없이 조직 개편을 준비했다. 반드시 취해야 할 사람과 내어주거나 내칠 사람 등 리더 급들의 생사여탈은 조 상무의 의중에 달린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 욕심이 많은 만큼 사람을 버리는 데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11월 10일 오전 10시 (조상무 방 회의실)
"이 팀장, 이제 사업 보고도 마무리되었으니 내년도 우리 사업을 이끌어 갈 조직원 구성에 대해 빠르게 준비해야 할 시간입니다. 신규 사업부이니 조직도 더 커져야 하고 자리도 더 많아져야 합니다. 이 팀장 생각에는 어떻게 조직을 확대 개편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가져와보세요. 그 자리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아이디어도 전달할 테니, 내년도 조직을 촘촘하게 제대로 꾸려봅시다. 이제부터 이 팀장은 추노꾼입니다. 흩어져 있는 인재들을 찾고, 무조건 잡아오세요!"
갑작스레 조직 개편안을 가져와 보라는 조 상무의 요구에 기획팀장은 허를 찔린 기색에 역력했지만, 역시나 30분도 채 고민하지 않고 유 차장님에게 그 일을 그대로 토스했다.
"유 차장, 아까 사업부장님 하신 말씀 잘 들었지? 현재 조직에서 어떻게 개편하면 좋을지 팀원들이랑 고민해서 아이디어 짜 봐. 초안 나오면 보면서 같이 이야기해 보자."
1년 내 거의 모든 업무를 던지다시피 한 이 팀장이기에 팀원들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며 자연스럽게 유 차장님을 중심으로 조직 개편 업무에 착수했다. 지난 1년 동안 인력부족으로 고생했던 쪽과 반대로 인원은 많으나 성과가 미흡했던 조직 등 내부적인 리뷰를 통해 어느 조직을 확대하고 어느 조직을 조정할지 초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새롭게 들어갈 리더급 자리의 인선 내용은 비워진 채였다. 인선에 대한 것은 팀원들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1월 13일 오전 10시 (조상무 방 회의실)
"이번 조직개편의 중점 사항은 제품 개발인력 확충과 유통 관리조직 확대입니다. 올 한 해 개발인력 부족으로 제품 출시 일정까지 굉장히 타이트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출시 이후, 내년도 개선 제품 개발에도 차질이 예상됩니다. 따라서 경력직 인원 대거 채용과 함께 기존 사업부 인원에 대해 내부 공모를 진행해 빠르게 전문 인력 확보를 추진할 계획입니다. 유통 관리 조직은 올해 확보한 전국망 유통을... (생략)"
유 차장님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인사조직 개편안을 이 팀장이 발표하였고, 큰 무리 없이 진행이 이어졌다. 전반적인 방향성에 대해서도 조 상무가 동의했기에 이 팀장은 더욱 신이 나서 발표를 끝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다. 회의실에서 고성 없이 끝까지 발표를 한 일이 거의 없었기에 팀원들 모두 내심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 팀장은 잘 끝마쳤다는 기쁨에 겨워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이 팀장, 전반적인 방향성은 잘 잡은 거 같은데 이제 내가 준 미션에 답을 줄 차례입니다. 신규 개발팀 리더와 유통관리팀 리더급은 누구를 생각하고 있나요?"
조직도 껍데기 안에 사람 이름은 없었기에, 그리고 그에 대한 고민은 1도 하지 않았기에 기쁨에 찼던 이 팀장의 표정은 일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에 대한 부분까지는 아직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사업부장님. 지금 보고 드린 조직도 기준으로 리더급 인선에 대해 준비해서 별도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림을 그렸으면 그 안도 채워 넣을 줄 알아야 그게 기획팀장입니다. 껍데기는 여기 있는 팀원들도 다 그릴 수 있어요. 결국 그 안에 누굴 채워서 조직을 밀도 있게 완성할 것인가, 그걸 고민하라고 미션을 준겁니다. 이 팀장, 내가 분명 추노꾼이 되라고 했을 텐데요. 일단 자리를 내어놓아야 할 리더부터 알려줄 테니 그걸 포함해서 다음 주 월요일까지 채워오세요."
새롭게 출범한 사업부에서 첫 해 리더로서 모든 팀장님들이 고생했지만, 조 상무는 그중 1/3 가까이를 새롭게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성과가 계획 대비 부족했거나, 본인이 시킨 일을 빠르게 처리하지 못했거나,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그 이유는 다양했겠지만 그에 대해 특별한 설명 없이 교체 인선이 진행되었다.
빈자리는 누구로 채울 것인가는 진행과정에서 더 큰 논란이 되었다. 다른 사업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거나 이미 주요 보직을 수행 중인 리더급들이 영입 물망에 올랐고, CEO/CHO의 지원을 등에 업고 찍어 누르다시피 인사발령이 진행되었다. 오는 사람들도, 그들을 보내는 사람들도 누구 하나 납득할 수 없는 인사였지만, 추노꾼처럼 회사의 인재들을 빨아들인 조 상무는 내년을 위한 유통사업부의 새로운 진용을 차근차근 완성해갔다.
조직은 커졌고, 자리는 늘어났으나, 신규사업부에서 리더를 맡은 첫해 사업의 성과를 위해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고도 조직에서 밀려난 리더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분들은 조용히 다른 사업부나 지원센터의 팀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분들의 1년간 노고를 구성원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송별회나 고생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자리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쓸모를 다한 노비를 다른 곳으로 내치고, 더 젊고 튼튼한 노비를 채우듯 조직 내 손바뀜이 있었을 뿐이었다. 추노꾼으로 임명되었던 기획팀장 또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지만, 결국 올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그 추노꾼으로 인해 내년도 조직에는 큰 파장이 일 것임을 그때까진 아무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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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Photo by Kelli McClintock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