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당근, 유자차, 카레가루

by 여설

마트에 갔다.


어느 자리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길 한쪽에 더미매대로 쌓여있는 유자차가 보였다.


위에는 먼지가 껴서 꼬질꼬질하고 육안상 깨끗한 유리병을 집었지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먼지의 느낌은 기분이 나빴다.


얼른 집으로 가서 손을 씻고 싶었지만

감자와 당근, 덤으로 고구마도 몇 개 집었다.


계산을 하고 나서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갔지만

이상하게 늦은 오후의 하늘은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이왕 나온 거 좀 걷다 갈까 싶었지만 손에 들려있는 유자차가 무거워서 그건 무리다.

대신 커피라도 하나 사가지고 가지 뭐.

중얼중얼 거리며 바로 앞 커피집으로 갔다.


신호등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는 최근에 들어섰다.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그동안 멍하니 바람도 쐬고 하늘의 구름도 보고 있었는데

자꾸만 느껴지는 무게에 문득 유자차를 샀는데 커피는 낭비였네 하는 또 다른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 어때?"


커피는 금세 나왔고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였다.


"아! 카레가루 안 샀어."


오랜만에 카레를 먹고 싶어 맘먹고 나섰는데 가장 중요한 재료를 빼먹고 와버렸다.


"하~"


불도 키지 않은 거실에 앉아 멍하니 어두워진 집안의 쓸쓸함을 받아들여본다.

그때 눈앞에 들어온 유자차.


저 무거운 걸 들고 왔지만 다시 나가야 한다는 귀찮음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두우니 유자차 뚜껑에 쌓여있는 먼지들이 더욱 진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가기는 싫었지만 유치자병을 들고 싱크대로 향하였다.


오래 쌓여 있던 먼지였는지 흐르는 물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손으로 문댔다.


먼지인데 미끌거리는 감촉에 소름이 돋았지만 이네 뽀득, 뽀득 거리는 소리와 함께

쌓여있던 먼지들이 사라져 갔다.


"한잔 마실까?"


커피도 있고 카레가루를 사러 다시 나가야 했지만 유자차는 먹고 싶었다.


흰색 머그컵을 집어 들다가 한쪽에 엎어져 있는 투명한 내열 유리잔을 바라봤다.


손잡이가 없어서 뜨거운 걸 마시기는 힘들지만

애초에 편하게 마시려고 산 컵이 아니었다.


유자차자 에이드처럼 예쁘지는 않지만 왠지 모르게

유자껍질과 조각난 과육이 숟가락에 돌려져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졌다.


머그컵을 다시 내려놓고 내열유리잔을 집었다.


숟가락으로 3번, 아니 4번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가 차가운 물을 조금 부었다.


유자차의 꿀인지 아니면 온도가 다른 물 때문인지

투명한 유리잔 아래에는 여름날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중력을 거스르는 아지랑이가 탄산처럼 위로 올라가다 숟가락에 사라졌다.

내가 보고 싶었던 유자의 내림이 시작되었다.


쌉쌀한 유자껍질이 무겁게 내려가고 그 주위로 잘게 조각난 과육이 몇 번 유영하다 가라앉는다.

뿌옇게 변한 유리잔 안 유자차.


거실의 창으로 노을의 작은 빛이 스며들어왔다.


내 근처로 오지 않았는데도 유리잔 때문인지 눈이 부셨다.


"다네.."

새콤할 줄 알았지만 1 숟갈 더 넣는 바람에 달아졌다.


"하~ 가자."

유자 껍질이 깔려있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카레가루를 사기 위해서, 건물 사이로 가라앉는 붉은 노을을 보기 위해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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