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밤공기는 아직 쌀쌀했지만, 우리는 들떠 있었다.
수년 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와 함께였다.
우리는 공연을 보고, 리조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공연이 끝나고 몸에 남은 잔열에 이끌려 미국식 스포츠펍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스크린을 꽉 채운 NFL 경기 중계.
리조트에 온 사람들과 공연을 보고 나온 이들이
삼삼오오 앉아 맥주와 수제버거를 즐기고 있었다.
육즙이 가득한 햄버거 패티를 보자 배가 몹시 고파졌다.
"수제버거 세트랑 맥주 한잔?"
순간 술을 마시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오랜만에 일상에서 벗어난 밤이었다.
열일곱 살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초등학부모가 되어 맥주잔을 부딪혔다.
"야, 이제 자주 보자. 너도 아들이 초등학생 되었으니까 이제 좀 자유로워질걸.
그동안 모아둔 곗돈으로 여행도 가고 그러자!"
나는 친구의 말에 왠지 입 안에서 쓴 맛이 느껴졌지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마셨던 맥주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1박 2일의 짧은 자유시간은 금세 끝났고, 혹시 몰라 챙겨갔던 생리대는 꺼낼 일이 없었다.
날짜를 다시 헤아려봤다.
그럴 리가.
약국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로켓배송으로 임신테스트기를 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남편과 아이가 집에서 나간 후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의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두 줄이었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다. 겉옷만 걸치고 바로 동네 산부인과로 갔다.
의사는 내 말을 듣더니 초음파부터 보자고 했다.
둔부와 허벅지에 닿는 굴절의자의 매끈하고 차가운 기운에 순간 몸서리쳤다.
잠시 후 동그랗고 까만 점 같은 음영이 화면에 잡혔다.
진료실 의자에 다시 앉으며 의사가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 아니... 저는...”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의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기다려주었다.
“저 내년에 마흔이고요. 지금 공황장애랑 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그 사이에 술도 계속 마셨어요. 어젯밤에도요."
의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약이 임신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면 애초에 임신이 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일단 다음 주에 다시 초음파 봅시다. 말씀하신 정신과 약은 정신과 선생님과 상의해 보시죠.
그리고..."
의사의 말이 웅웅 울렸다.
프론트 데스크에서 건네받은 '임신 사실 확인서'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산부인과를 나오자마자 다니던 정신과에 전화했다.
연결 대기신호가 길어지는 동안 내 머릿속은 점점 하얘졌다.
약을 끊어야 할지도 모른다...
병원을 향해 걸어가며 가장 먼저 밀려온 감정은 단 하나였다.
두려움.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이 갑자기 굽어지고 휘어지고 있었다.
(3화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