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역 승강장

by 미스루

첫 임신 때였다.


아침 7시 35분

신분당선 양재역 승강장.


우르르 쏟아졌다 사라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우두커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가방에 달린 임산부 배지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툭. 툭. 툭.


맨손으로 눈물을 훔고,

오른손은 배를, 왼손은 허리를 받치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환한 조명 아래 아직 한산한 병원 로비를 지나,

창문 하나 없는 컴컴한 사무실에 불을 켰다.


하루 종일 환자, 보호자, 전공의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배가 심하게 뭉쳐왔다.


"아, 싸가지 없는 XX."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내게 옆 자리 선생님이 말했다.


"배 속에 아기가 들어. 이쁘게 말해야지~"

"아, 몰라요! 얘도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알아야죠!"


나는 출산예정일 일주일 전까지 출근했고,

아이는 예정일보다 일주일 빨리 험한 세상에 태어났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의 복직과 함께 아이는 어린이집과 시어머니에게 맡겨졌다.

새로운 곳에서 맡게 된 일은 예상보다 보람 있었다.


신규 시절 퇴근길에 차도로 뛰어들까? 생각하고,

야근을 하던 사무실에서 매듭을 묶는 방법을 검색해 보던

충동은 어느덧 사라졌지만

어차피 죽는 게 인생이라고 버릇처럼 생각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 수명을 담보로 돈을 벌고 있었다는 걸.


남편과 상의 끝에 나는 전업주부가 되었다.


그리고... 공황이 찾아왔다.


1년이 넘는 치료 끝에 겨우 외출이 두렵지 않게 되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우리 셋은 완벽한 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루고 있었다.

아들은 잘 크고 있고,

나는 전업주부의 역할에 몸을 맞춰 가고,

남편은 자신의 일을 단단히 쌓아가고 있었다.


어렵게 얻은, 깨지지 않을 균형이라고 믿었다.


백화점에 걸린 아기자기한 꽃무늬 원피스와 앙증맞은 구두를 구경하다 보면

'나에게도 딸이 있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경한 생각이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절대로.


그런데—




"저, 제가, 지금 산부인과에서 오는 길인데... 임신을 했어요."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진정시키듯이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네, 우선은 좋은 일이니까요. 축하드립니다. 천천히 말씀 나눠보죠."


의사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태아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그래서 어떤 약도 100%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렇지만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봐온 환자분들 모두 그랬습니다."


"네..."


의사의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복용 중이던 모든 약을 중단하고,

임신 중에도 복용 가능하다고 판단된 유일한 약을 처방받았다.


"불안장애 초기에 쓰이는 약이에요. 원래 드시던 약만큼은 아니지만 효과는 있을 겁니다. 하루 두 번으로 시작해 보죠."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남편은 내가 거절하리란 걸 알면서도 수술 이야기를 꺼냈다.


“꼭 낳지 않아도 돼. 네가 더 중요해.”


다정하고 냉정한 사람.

어떤 것을 배제할지는 결국 나의 몫이었다.


어디선가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의 진동이 점점 커졌다.

떨리는 무릎을 붙잡고 승강장 벤치에서 일어섰다.


기쁨도 설렘도 없었다.
그저 두려울 뿐.


바람을 일으키며 열차가 멈춰 섰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눈앞을 가렸다.

문이 열렸다.

나는 스스로 환승열차 안에 발을 내디뎠다.



(4화에 이어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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