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술의 선구자 피에트 몬드리안은 처음부터 추상미술가가 아니었다. 초기 몬드리안은 인상주의풍의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는데 20세기 초, 야수파나 점묘 주의에 영향을 받으며 개인적인 스타일을 개척해나갔다.
1911년, 몬드리안은 파리로 이주했다. 네덜란드 미술에서 벗어나 파리의 전위예술, 특히 파리 예술계를 주도하던 입체파를 확인하고 입체파적 스타일을 실험하고 싶었다. 원래는 피카소를 만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피카소를 만나지 않았다.
파리에서 몬드리안은 다양한 입체파적 조형을 실험했다. 그러면서 몬드리안은 입체파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몬드리안은 입체파가 자신들이 발견한 조형의 논리적 결과를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몬드리안의 논리를 보자. 19세기 후반, 형태의 본질을 찾던 폴 세잔은 자연을 원통으로 단순화했다. 세잔의 조형을 따라 형태의 본질을 탐구했던 입체파는 형태를 육면의 각진 면들로 분석했다. 몬드리안은 당연히 입체파가 형태를 점, 선, 면이라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단순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형태의 본질이고 조형이 나가야 할 진화이니까.
그런데 피카소와 브라크는 추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미술은 추상이 아니라고 역정을 내면서 말이다. 신조형 주의자 몬드리안에게 피카소와 브라크의 말은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진화는 언제나 개척자의 일이며, 그들의 추종자는 언제나 수가 적다.
몬드리안에게 피카소와 브라크는 더 이상 20세기 미술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몬드리안에게 그들은 미술의 진보에 걸림돌이 되는 적폐 세력이었다. 1908년 미술의 혁명을 일으킨 피카소와 브라크가 불과 5년 만에 미술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만 것이다.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등 전위미술가들이 보기에 그랬다.
몬드리안은 추상이야말로 조형의 본질, 사물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세계라고 생각했다. 몬드리안에게 형태는 면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면은 선의 연장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선은 점들의 연장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것이 사물의 진실, 조형의 본질이었다.
는 것이 몬드리안의 믿음이었다.
몬드리안의 작품세계는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점, 선, 면의 구성(Composition)으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몬드리안은 나무를 입체로, 입체를 면으로, 면을 선들로 단순화시켜나갔다. 마침내 몬드리안은 자연의 모든 물체들은 수평선과 수직선만으로 단순화시키며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이루어진 추상미술에 이르렀다.
몬드리안에게 추상의 세계는 단순히 또 하나의 창조가 아니었다. 그에게 현실은 너절한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세계였고, 추상의 세계야말로 세상의 진실한 모습이었다.
추상 예술은 다른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현실의 비전이다.
이 새로운 조형의 아이디어는 외관, 즉 자연적인 형태와 색깔의 세부 사항들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1917년,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는 반 뒤스부르그 등과 전위예술잡지인 데슈틸(De stijl)을 창간하였다. 데슈틸(De stijl)은 영어로 양식(The Style)을 의미하는 네덜란드 말이었다. 데슈틸운동의 기본 목표는 기본적인 화면의 균형을 통해 보편적인 조화를 미적으로 구체화할 초자연적인 질서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
초자연적인 질서란 이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몬드리안이 후에 신조형주의라고 명명하였던 것으로서 기술 사회에 있어 예술이 있어야 할 모습을 의미했다. 신조형주의는 20세기 기계시대가 필요로 했던 새로운 조형 양식, 추상미술이었다.
신조형주의는 단순히 순수예술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실내공간이나 건축, 일상 사물의 모든 것에 신조형주의의 원리를 적용시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추상 조형언어로 만들어지는 유토피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