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세계 미술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후기 인상파의 두 대가(고흐와 고갱)는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에서 역사적인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 두 달 동안 진행된 공동작업은 두 달 만에 끝이 났다. 크리스마스 전날 고흐가 귀를 자르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지만, 고갱은 그들의 공동작업이 모종의 결실을 거두었다고 주장했다. 고갱의 말이다.
고갱의 상징주의 예술관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고갱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고흐는 자신의 표현주의 예술관을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고갱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흐에게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갱이 아를에 도착하기 전, 고흐는 고갱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화가의 침실>, <밤의 카페>, <시인의 정원>과 같은 걸작들을 그려냈다. 고흐는 고갱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정말 열심히 그렸고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1888년 10월, 고흐와 고갱의 공동작업이 시작되고 고흐는 고갱의 영향으로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해 그리는 방법(종합주의), 즉 추상적으로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 당시 고흐는 인상파적 스타일을 바탕으로 한 표현적인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고갱은 고흐에게 인상파는 한물 간 미술 양식이고 수준 낮은 그림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고갱에게 용기를 얻은 고흐는 상상력을 동원해 <에텐 정원의 추억(Memory of Etten)>과 <독서하는 여인(Novel reader)>,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 등을 그렸다.
그러나 고흐가 상상의 공원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빌헬미나가 산책하는 모습을 그린 <에텐의 추억>은 평소 고흐의 그림과 같은 박진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 <독서하는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눈앞에 대상을 보지 않고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고흐에게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고역이었다.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릴 때는 고갱의 그림에서 나오는 나무를 베껴서 그려야 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나무는 고갱의 <설교 후의 환상>에서 따온 것이다. <독서하는 여인>도 전혀 고흐의 그림 답지가 않다. 얼굴 표정이며 손의 모습, 색채... 어느 것 하나 고흐의 특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눈앞의 현장에 감동하여 감정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려 정신없이/미친 듯이 물감을 쏟아붓는 아래 <씨 뿌리는 사람> 같은 그림이 진정한 고흐 다운 그림이다.
그럼에도 고갱은 모든 것이 자신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자랑했다.
1888년 아를에서 고흐와의 공동작업을 할 때 고갱은 <아를의 포도 수확>을 그렸는데, 고갱은 이 그림이 자신이 그린 최고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고흐도 고갱의 작품에 감동해 기억에 의존한 고갱의 작업 방식을 이용해 <독서하는 여인>, <에텐의 추억>, <자장가> 등을 그렸다. 그러나 후에 고흐는 상상으로 그리는 것은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고갱의 방식을 포기했다.
석양을 받으며 붉게 물든 포도밭에서 분주하게 포도를 따는 여인들을 속도감 있게 표현한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나 빠른 물살, 반짝이는 물결, 눈부신 태양 등 감동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현장감을 충실히 반영하는 고흐의 그림은 언제나 박진감이 넘쳐흐른다. 같은 장소에서 그린 폴 고갱의 그림을 보면 현실을 포착하는 두 작가의 앵글과 작품에 접근하는 태도와 작업 방식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 수 있다.
"고흐는 미술은 추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고흐도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다. 극도의 감정을 이입시켜 형태와 색채를 과장하여 표현하는 고흐의 조형은 표현주의로 이어졌고, 나아가 추상표현주의로 이어졌다. 추상미술에 이르는 방법론적인 차이일 뿐, 고흐와 고갱은 20세기 미술의 혁명인 추상미술, 특히 비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탄생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