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폴 고갱(Paul gauguin)은 “미술은 눈으로 본 것 이상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눈으로 본 것 이상이란 정신/마음의 개입을 의미한다. 고갱에게 미술이란 단순한 자연을 사실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갱은 눈을 감고 내부의 기억이나 영혼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이미지를 떠올려 현실과 종합하여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현실과 마음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결합하여 그렸다 하여 그의 그림을 종합주의라고 부른다.
고갱은 친구 슈페네커와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갱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감동이나 주관적 느낌의 표현을 중요시했던 고갱은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았고 대신 주관적으로 느낀 형태나 색채를 과장하여 표현했다. 그런 이유로 고갱이 그림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미술에 비해 단순하고 강렬하다.
추상(Abstract)이란 현실을 근원적인 조형의 요소를 단순화하는 것인데, 마음속의 이미지는 형태가 단순하고 색채는 강렬하다. 눈을 감고 원하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라. 그러면 고갱의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고갱의 종합주의 미술은 의도하지 않아도 추상으로 결론 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1895년, 고갱은 "음악의 작곡처럼 내 그림은 사전에 세심하게 고려되고 계산된 것이다. 내가 일상생활이나 자연에서 선택한 대상은 소재에 불과하며, 선과 색의 확실한 배열로 심포니와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이 만들어낸 종합주의/상징주의 미술로 인해 자신의 앞날이 암초로 가득한 험로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의 결정을 확신했다.
건방진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고갱은 대단한 눈을 지닌 예술가였다. 그는 당시의 미술이 처한 상황과 미술의 미래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일요화가 출신이었음에도 고갱은 미술이론과 감각에 있어서 당시의 그 어떤 화가보다도 앞서 나간 작가였다.
고갱의 예상같이 추상미술가로서의 고갱의 앞길은 암초로 가득했다. 1888년, 장 발장 같이 고귀한 인물이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고통받는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했고, 그 후 제자들의 배신으로 고통을 당하는 그리스도로 자신을 묘사했다.
그에게 추상미술로 가는 길은 마치 십자가의 길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고갱은 추상미술가로서의 자신의 길을 확신했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다.
1888년, 아를에서 고흐가 귀를 자른 사건을 일으킨 후 고흐와 헤어지고 퐁 타방으로 돌아온 고갱은 자신의 머리를 도자기로 만들었는데, 눈은 감기고 귀가 잘린, 그리고 머리에서는 붉은 유약이 피처럼 흘러내리는 특이한 도자기였다.
이 작품은 고흐와 자기가 모두 사회의 피해자이고, 사회의 부당한 대우로 인해 언젠가 자신도 고흐와 비슷한 비극적 결말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만들었다.
고갱은 미술은 자연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아니라 추상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근을 무시한 구도, 단순화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를 바탕으로 상징주의/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고갱에게 영향을 받은 나비파(Les Nabis)는 고갱의 상징주의 조형을 이어받아 작품을 더욱 장식화하였고, 20세기 미술이 추상으로 나아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888년, 퐁 타방에서 고갱을 추종하던 폴 세루지에(Paul Sérusier)는 폴 고갱에게 한 수 배우기를 청했다. 고갱은 세루지에에게 말했다.
자네, 저 나무가 무슨 색으로 보이는가? 파란색으로 보입니다.
그럼 파란색으로 칠하게
그럼 저 물은 무슨 색으로 보이는가? 노란색으로 보입니다.
그럼 노란색으로 칠하게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이 <부적>이었다. 세루지에는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 출신의 젊은 화가들에게 고갱에게서 배운 이야기를 들려줬고, 이들은 나비 파란 미술 그룹을 발족시켰다. 새로운 예술의 선구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나비 파는 상징주의 미술운동을 전개했고, 추상미술의 선구자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