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시골집에 오는 길에 면사무소에 들렀다. 자리들이 거의 다 비어있어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도 아니었다. 구석에 앉은 세 분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 한 분의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아 네. 물어볼 일이 있어 왔는데 담당자가 안 보이네요." "아 그러면 담당자가 내일 나오면 그때 오셔서 여쭈어 보시면 안 될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오늘 휴가인 모양이죠?"
"아 그게 아니라~" 하고 직원이 말해 줄 때서야 알아차렸다.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죄송하다며 거듭 사과하고 조용히 면사무소를 빠져나왔다.
매주 월요일 서울에서 내려와 집으로 오는 길에 면사무소에 자주 먼저 들른다. 귀농 귀촌 관련한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매 월마다 확인하고 지원부문마다 신청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지원 보조대상 가운데 농기계 구입비가 특히 나에게 중요하다. 가격이 3천만 원 이상되는 SS기(농약살포기)와 수백만 원씩 하는 농업용 운반기기에 대해 지원대상자로 선정되면 50%를 정부에서 보조해 준다. 그러나 대상자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상자는 항상 줄 서있다. 차례가 언제 올지 모르기에 마냥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기다릴 수 없는 농가는 스스로 알아서 구입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농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농기계는 임대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필요한 동종의 농기계가 많지 않으므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곳은 거의 다 사과 농가들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어떤 농기계를 써야 할 때 다른 농가에서도 똑같이 필요할 때다. 반대도 그렇다. 다른 농가에서 이용 후 그때서야 임대하게 되면 때를 놓치게 된다. 그리고 임대사업소가 원거리에 있어 가져오고 반납하는 과정을 수시로 반복하기에 번거롭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폭우피해 걱정에 서둘러 내려왔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가이고 늘 습관처럼 들렀던 면사무소에서 월요일인 줄 착각하고 그들을 대했던 것이다.
한주일 내내 폭우가 내렸고 어젯밤부터 날씨가 개었다고 하니 급하게 농약을 칠 예정인 농가가 많을 것이다. 지금은 농가마다 병충해 발병이 증가하는 비상시국(?)이다. 비록 일요일 휴무일이지만 조합원들의 시급한 필요를 따라 농협에서 비상근무 체제를 가동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이곳 병충해 발병사정도 알고 싶고 농약도 구입을 해야 해서 혹시나 하고 살짝 들러보았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그렇지. 일요일은 일요일이지. 문이 열려 있기를 바라는 기대는 오직 내 욕심일 뿐이다.
10여 일 만에 만나는 집 뒤 채소 밭은 그동안 풍성해져 있었다. 방울토마토는 빨갛게 많이 익어 있었다. 오이도 가지도 호박도 그리고 고추도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오이 하나는 너무 커서 줄자로 재어보니 50센티미터나 되었다. 이렇게 큰 오이는 평생에 처음이다. 자라는 내내 수분을 필요로 하는 오이인데 이번 일주일 동안 폭우가 쏟아졌으니 이만큼 더 크게 자랄 수 있었나 보다.
사과밭으로 나갔다. 폭우로 인한 피해는 다행히 심하지 않았다. 사과 알이 그동안 주먹만 할 정도로 크게 자라 있었다.
사과끼리 서로 붙어 있거나 앞으로 자라면서 접촉할 여지가 있는 사과열매는 전지가위로 솎아냈다. 이대로 굵어지면 서로 맞닿아 쓸리게 된다. 그리고 약해진 그 부분을 통해 병충해가 집중 유입된다. 또한 바람이 불 때 서로 부딪히며 상처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 둘 다 상품성이 사라진다. 하나라도 살려야 하기에 아깝지만 하나만 두고 나머지는 버린다.
너무 가깝게(30cm 정도 이내) 다닥다닥 붙어 자라는 사과도 솎아 줘야 한다. 적어도 사과 하나당 잎사귀 30개(어떤 이들은 50개 이상으로 본다) 이상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광합성을 통한 충분한 양분공급을 받지 못한다. 사과가 크게 자라지도 못할뿐더러 맛과 질까지 떨어진다. 거기다가 내년도 꽃눈을 받을 영양분 비축을 어렵게 한다. 비축을 못하면 바로 해거리로 이어진다.
비가 일주일 내내 내린 탓에 사과밭에 잡초도 많이 자랐다. 일부 농가는 제초제를 살포하거나 예초기로 풀베기를 한다. 그러나 나는 긴 장대호미를 사용하여 풀들을 하나하나 모두 정리하고 있다. 제초제를 쓰지 않는 것은 가급적 토양을 살리고자 함이다. 예초기 사용은 소리와 진동이 심하고 다루기에 익숙하지 않기에 위험하다고 느낀다.
시간여유가 있으니 이번 주 내내 사과솎기와 병행하여 사과밭 풀을 하나하나 맬 것이다. 특히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는 억센 줄기식물 제거가 급선무다. 숨도 쉬지 못하도록 가지를 총총감아 올라가는 탓에 과일성장에 방해되고 가지를 고사시킬 수도 있다.
이제 긴 호우가 지나간 직후이므로 한꺼번에 창궐하는 병충해를 막기 위해 사과나무에 즉시 방제약을 살포해야 한다. 농협에서 농약을 사 오면 밭 두 군데 중 한 군데는 해가 진 저녁 무렵(오후 6시)에, 다른 한 군데는 그다음 날 해뜨기 전 새벽 일찍(새벽 5시) 살포할 생각이다. 대낮 약제살포는 효과도 감소하지만 무엇보다 방제복에다 마스크로 인해 더위를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과밭 옆집 손사장네 고양이 세 마리가 창고 안에 있다가 밭에 나온 나를 알고 밖으로 얼굴을 살짝 내밀고 빼꼼히 쳐다본다. 그것이 내게 하는 그들의 첫인사다. 가져간 캔 간식을 흔들며 보여주자 곁으로 모여든다. 그릇을 찾아 간식을 부어주니 모두 맛있게 잘 먹는다. 귀여워서 쓰다듬어 준다.
사과밭에서 돌아와서 오이도 토마토도 가지도 호박 그리고 고추도 한 바구니 땄다. 잘 씻어 바구니에 담아 미러리스 카메라로 예쁘게 사진을 찍었다. 서울에 있는 가족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서다.
비 피해 걱정에 급하게 내려왔지만 와서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낮 햇살은 여전히 뜨겁고 온도는 높지만 해가 지고 어두워지니 열대야도 없고 산들산들 바람도 불어주고 좋다. 지내기에 좋은 오늘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