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Jan 04. 2024

아내가 통장에 돈을 보냈다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남자의 발버둥

   



여느 때처럼 어둠을 몰아내듯 새벽에 일어났다. 심연에 빠진 뱃살공주 깨지 않게 살금살금 옷을 갈아입고 공원으로 나갔다. 여느 때처럼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도는 사람들…. 그 틈바구니에 끼이고 싶지 않아 홀로 완력기와 씨름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을 넘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아내가 집을 나갔다. 더불어 먼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까 조용하기만한 집안이다. 순간 여느 때와 달리 이상한 기운이 집안에 깔렸음을 느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였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이 있다는,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본능이 긴장하라며 거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소파에 몸을 의탁하고 싶었으나 여느 때처럼 싱크대를 확인하였다. 천장지구(天長地久) 하늘과 땅이 영구히 변함이 없듯, 빈 그릇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내 깔끔한 성정에 그냥 두보만 볼 싱크대가 아니라고 믿음에서 우러나온 산더미 그릇 쌓기 행위다. 설거지가 유일한 내 취미생활이라 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불만이다. 일단 허기부터 면하기로 하였다.   

  

식탁 위에 제법 큰 플라스틱 통이 놓였다. 뚜껑을 열자 뭔가 가득 들었다. 옆구리 터진 김밥과 주둥이 갈라진 김밥 꼬다리가 비빔밥처럼 뒤섞여 비웃는다. 정녕 남편 드시라고 해둔 것이렷다? 온전한 김밥은 어디로 가져간 것일까. 가스레인지에 작은 냄비가 올려 있다. 뚜껑을 열자 콩나물국이 분명한 데 콩나물 몸은 어딜 가고 노란 대가리만 남았다.      


영양가라곤 하나 없는 콩나물 대가리를 채로 걸러냈다. 국물에 라면 반 개 삶고, 파 송송 썰어서 투입한 후 패잔병 김밥무더기를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시야가 흐릿한 것이 본인에 대한 자애로움이 넘치자 자기연민이 도를 넘었다.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았다. 9시 반을 넘기고 있다. 목이 조이듯 말랐다. 라면 국물까지 남김없이 흡입하였다. 이를 기회로 재료 제각각 맛을 내는 김밥 찌꺼기까지 몽땅 입에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어 꾸역꾸역 삼켰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찾는 순간 휴대폰에 노란 알림이 떴다. 돈이 들어올 일은 없고, 나갈 일이 많은 삶에서 은행 소식은 결코 반갑지가 않다. 그런데 웬?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아침에 김밥 도시락을 싸서 집을 나간 아내가 돈을 보냈다. 동시에 카톡도 알림이 떴다. 뱃살공주다. 불길한 톡이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우리 앞집에 성보살이라는 늙은 무당이 살면서 정월 초 첫 묘일(卯日), 토끼날(?)이 되면 아버지 몰래 나를 불러 법당에 남자 족적을 남기게 했던 효과가 나타나는 듯하다.     


따로 살아요   


사실 김밥은 옆구리 터진 거나 주둥이 터진 꼬다리가 더 맛나다.




훅 치고 들었다. 등줄기서 머리 뒤 꼭지까지 번개 맞은 듯하다. 옆구리 터진 김밥이 떠올랐다. 하필 오늘, 그것도 저녁에 아주 기분 좋은 모임이 있는 날, 추억에 함몰되어 기분을 업데이트 하려는 순간에 거금을 입금하면서 인연을 매듭짓자는 말이다. 순식간에 권총의 격철을 세우듯 상대를 향한 촉수가 안테나처럼 솟았다.


온 신경은 주변을 장악하며 본능을 넘어 이성, 이성을 넘어 감성을 깨우면서 비상사태를 알리며 귀청을 통과하는 소리로 작전사령부에 모여들었다. 순식간이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위기 상황이라고 하여도 품성에 합리성을 부여하되 수단과 방법을 가려 결과보다 덕목을 구현하라는 이성적 이상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예상도 하지 못했고, 힌트도 어떠한 예고편도 없었다. 배신감이 몰려들었다. 정확하게 까닭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일천한 기억력의 나와는 달리 케케묵은 과거까지 소환하는 뱃살공주의 질긴 기억력이 지금까지 스스로 상처 내며 시시때때 건드려왔음을 짐작하였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침전물을 한 번씩 휘저어가며 자가발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침착하자를 뇌였다. ‘흥분하지 말라. 판단이 흐려진다. 적은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공격한다. 화해를 중재를 하는 그놈이 바로 배신자다. 너의 속을 다 드러내 상대로 하여금 알게 하지 마라 공격의 포인트가 된다.’ 이 모두 마리오 푸조가 쓴 ‘대부’에 나오는 대사다. 그리고 상대의 약점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상황판단이 우선이다. 상대 의도는 우리도 남들처럼 ‘졸혼’이란 거 해보자는 거였다. 그렇다면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시간 끌기…, 한때나마 정치광고에 밥을 먹었던 기억을 살려냈다. 후보 간 토론의 장에서 상대후보가 묻는 질문에 일일이 성실하게 대답하는 후보는 바보다.

장고 끝에 ‘이렇게 큰돈을 쾌척하시다니요! 감동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낸 돈에 따따블 주면 따로 사는 거 생각해 보겠네요. ㅋㅋㅋ’ 라고 답장을 보냈다. 환영형에 이어 뭉개기를 실천했던 것이다.


돈은 잘 받았으나, 방금 당신의 말은 내 감정 규칙상 상대로 하여금 오인하기 쉬운 까닭에 대답은 다음으로 미루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초점 흐리기가 이어져야 한다. 집에 냥이 큰놈 카니가 소변을 잘 보지 못해 걱정이라며 톡을 보냈다. 그리고 더는 톡을 열지 않았다. 톡을 읽는 뱃살공주 표정을 상상하면서…….     


짧은 시간이 지났다. 생각과 의도와는 반대로 몸이 긴장했다. 명치끝이 아파왔다. 위장이 뒤틀리는 듯하다. 쪼잔한 심장이 신경을 건드리며 위경련이 가동된 것 같다. 급하게 비상약을 찾아 넘겼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한쪽에 톱니처럼 불이 번쩍이며 돌아다닌다. 편두통이 시작되었다는 신호다. 정말 대단한 뱃살공주다. 짧은 명문으로 60년 세월을 경험한 남편을 초주검 상태로 몰아넣다니. 그러나 빈손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버틴 저력의 나다. 나는 나란 뜻이다! 하층민 인생은 마냥 버티는 것!     


소파에 몸을 던졌다. 냉정하게 나를 보았다. 내가 어떤 처지인지, 내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가 중요했다. 그러나 정작 눈앞에 빙판길이 끝없이 펼쳐진 느낌? 해는 저무는데 기력도 떨어지고, 배도 고팠고, 굶주린 늑대가 숨죽인 채 때를 기다리며 소리 없이 따라오는 상황이라, 맨발로 차안(此岸)의 바다를 건너야 하는 가련하기 짝이 없는 늙은이가 광야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벗어나야 했다. 착한 본능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폭력의 본능을 충분히 제압하고도 남을 이성이 개입되면서 절제의 미덕을 실행에 옮겼다. 이를 때일수록 잘 보여야 한다는 미천하고도 순박검박한, 순종의 심성을 자극했다. 마치 주인마님 대신 전쟁터에 끌려가도 감동의 눈물을 질질 짜는, 폭탄을 싣고 뱃머리에 몸을 던지는 카미카제처럼, 주군을 위해 기꺼이 할복에 동참하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사무라이가 되어야 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씻은 빈 그릇은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아 제자리에 차곡차곡 쟁여 넣었다. 싱크대에 물기 하나 없이 만든 후 안방 뱃살공주 침대 정리도 끝냈다. 그러는 동안에 머릿속도 쉬지 않았다.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냉철한 분석에 들어갔다. 따로 살아도 그리 슬플 일 없다. 지금보다 혼자 깔끔하고 멋스럽게 살 자신이 있다. 그러나 내게 물었다. 외로움을 견딜 재간은 있더냐? 고독을 즐길 자신은 있으나,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외로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


여전히 뱃살공주를 사랑하는가? 사랑? 연애 5년 결혼 34년차 이만하면 됐다. 그러나 자라꼬랑지만큼 정이란 놈이 남아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자라 꼬랑지를 자르자. 상처 나지 않게 순식간에 말이다. 그러나 가슴에 저절로 생기는 생채기는 피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결론이다. 돈을 보냈다는 것은 남편 네가 집을 나가란 뜻이다. 단언컨대 쫓겨나듯 나갈 수 없다. 죽더라도 격을 떨어트릴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통장으로 들어온 돈을 돌려준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얼마간의 돈과 몇 마디 단어에 몸과 정신이 감전 당했던 순간을 없던 일로 할 생각도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길게 반복했던 자문자답을 그쳤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백번 묻는 놈은 개만도 못하다.     

침묵, 말하는 자에 앞서 침묵하는 자가 경험적 실체를 터득한 자라고 나는 알고 있다. 잊는다. 나는 오늘 있었던 이 진기하고 진부하고 낯설고 생소한, 기막힌 사연과 과정을 떠올리지 않기로 하였다. 침묵에 들 것이다. 더불어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 뒤에 새싹을 기다리는 것처럼 인내와 희망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계속)               

이전 07화 뱃살공주 귀빠진 날 ②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