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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Dec 21. 2023

뱃살공주 귀빠진 날 ②

눈으로만 맛본 길 잃은 케이크




부(富)라, 늘 만족할 줄 아는 것보다 부유한 것은 없고, 귀(貴)라, 세속을 벗어나는 것보다 존귀한 것은 없다. 빈(貧)이라, 식견이 없는 것보다 가난한 것은 없고, 천(賤)이라, 기개가 높은 것보다 천한 것은 없다.

 - 이지(중국 비평가)        


자전거 타기로 장딴지와 허벅다리가 초긴장 상태가 되자, 주인인 나 역시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목적했던 운동량을 채웠다는 것에 만족이 찾아왔다.


옛날 맛집 취재 중 찍었던 이미지 사진(상주)


포장마차 주인 할머니가 챙겨 준 한국은행 달력을 품에 안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왔다. 집에서 밀린 일거리에 지쳤던지 식탁 의자에 넋 놓고 앉아 있던 뱃살공주 미늘 같은 눈이 반달만큼 커졌다. 내가 반가워서 그런 것은 아님을 안다. 손에 든 보따리에 신경이 쏠렸던 탓이다. 포장을 벗겨 벽걸이 달력은 서부영화 총잡이 모자 옆에 걸고, 탁상용은 컴퓨터 책상에, 다이어리는 책장에, 그리고 수첩은 내 백팩에 넣었다. 이내 눈이 제자리로 돌아간 뱃살공주 왈!      


“저녁은 어떻게 해결할까?”

“김장 김치랑 밥 먹으면 안 돼요?”

“국은?”

“시래기 된장국.”

“그럼, 당신이 끓일래?”





결국 이렇게 된 거였다. 너무 피곤해서 대충 씻고 대충 꾸역꾸역 먹고 엎어져 잠에 빠지고 싶었다. 그러나 끝내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냉한 기운이 등줄기에 닿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기막힌 생각이 났다.

“시켜서 먹으면 어때요? 족발? 해물찜? 짬뽕? 돈가스?”

머릿속에 수많은 요리 형상이 지나가고 있었을 법하다. 말을 던지고 대답이 나오기 전에 훌훌 벗고 욕실로 직행. 나는 굶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반항이었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 종일 집에서 일한 사람도 있는데…….”

하며 끗발을 부린다. 나는 결코 하라고 시킨 적이 없다. 흥!


‘민중에게 권력을, 권위에 저항하라!’


아들과 함께 뱃살공주의 권위에 저항해 결실을 얻어낼 수 있었다. 족발에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꿀잠에 빠졌다.

  



다음 날, 평소처럼 새벽 6시 30분에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공원으로 나갔다. 평소 안면만 익힌 할줌마가 반갑다면서 요구르트 큰 병 하나를 건넨다. 아주 잠깐이지만 찬 기운이 목을 타고 내장으로 침입하는 과정을 즐겼다.


그리고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 한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아내가 집을 나가고 없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일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이다. 백수도 월요병이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아내 방으로 들어가 침대 정리를 했다. 평소와 달리 애써 콧노래를 흥얼댔다. 월요병을 이겨내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다.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지만,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도 없다. 덩달아 마음도 리듬을 탔다.      

가스레인지 위를 살폈다. 휑하다. 단지 음식물 자국이 묻어 있어 시선을 건드렸다. 물휴지로 박박 닦고, 행주로 마무리했다. 역시 반짝대는 것이 내 마음 같았다.


개수대 속에 뱃살공주가 드신 듯 노란색이 입힌 그릇이 놓였다. 아마도 어제 만들어 놓은 호박죽을 드시고 나간 듯하다. 물김치 접시와 함께 깨끗하게 씻어서 건조대에 엎어 놓았다. 파란 불빛으로 26시간이라 표시된 밥솥을 열자, 밥이 가득 들었다. 반 그릇만 남기고 밀폐용기 두 개에 나누어 담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밥솥에 보온을 껐다. 나는 썩어도 준치다. 그런 까닭에 금방 지은 밥을 선호한다. 묵은 밥은 나머지 식구들이 비상시에 일용할 양식이 된다. 결국 집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내가 해결해야 할 때가 많지만 말이다.   

   

주먹만 한 컵라면에 밥을 말아서 김치와 함께 대충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노곤증이 밀려들어 눈을 뜰 수 없어서다. 그렇다고 침대에 등을 붙인다는 것은 월요일 아침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략 10여 분만 이겨내면 정신이 돌아올 것이다.


커피를 내렸다. 헤이즐넛 향이 거실을 은은하게 퍼짐을 즐기고, 천천히 음미한다. 헤이즐넛 커피와 사랑에 빠진다. 동시에 컴퓨터를 켰다. 브런치를 열고, 고맙게도 댓글을 주신 분께 댓글을 달고 이웃을 방문해 지식과 진리를 도둑질한다. 얼추 한 시간이 지나고 있다.

그때였다.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화면에 ‘뱃살’이라고 뜬다. 순간 등줄기에 찬 기운이 번개처럼 훑고 지나간다. 불안한 기운은 틀린 적이 없다.     


“오늘이 내 생일이어요?”


목소리가 마치 목에 얇은 비닐 조각이 깔린 듯 파장이 길고 날카롭다.

이런 된장! 망했다. 뒤이어,

“OO가 맞나 물어서….”

동생이 전화가 와서 묻더란다. 음력이고 양력이고 자기 생일이 며칠인지 모르진 않을 터이고, 이는 무늬만 남편이라 하여도 너는 뭐하는 인간이냐? 라는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음을 직감하였다.

“응? 오늘이 음력 며칠이니…, 그러네요!”




미역국 만큼은 자신 있게 끓일 수 있다

하고 얼버무렸다. 알았다면서 긴 여운을 남긴 채 끊는다. 그때부터 머리가 복잡해졌다. 딸도 있고, 아들놈도 있다. 이 자식들은 당최 뭐 하는 놈들인지. 저그 어머니 귀빠진 날도 잊고 있단 말이냐? 하며 화살을 아래로 돌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 있는 곳이 있는가 하면 없다. 정공법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 판단하였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삼칠기(運三七技), 세상은 결코 정의대로 행해지지 않는다. 3푼의 이치를 떠올렸다.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자 동정이 찾아왔다. 나는 순식간에 결백한 방관자가 되었다.     

곧바로 폰뱅킹을 열었다. 그리고 거금을 날렸다. 생일 선물을 사서 준 적이 있었나? 하여튼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샤넬 No 5. 립스틱 55번과 향수를 골라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했다가 색과 향이 취향이 아니라며 딸아이에게 휘리릭! 던져버린 과거의 뱃살공주를 기억해 냈다.





현실 대응 태도를 일컫는 명심(冥心)이란 말이 있다. 눈과 귀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물과 현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태도다. 나는 생일 선물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 우리 뱃살공주께서는 현금을 따르지 결코 현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진리를 깨우쳤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혜를 동원했다. 여자, 아니 아내의 본능을 자극하려면 현금이 최고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큰 금액을 줘도 결코 자신을 위해서 10%도 쓰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살림살이에 보탠다는 것을 나는 본능처럼 알아 차렸다. 돈이 들어왔다고 아는 순간 콧구멍 평수 넓혀가며 좋아하겠지만, 만 하루가 지나면 어차피 그 돈은 가족 공동 소유다. 하물며 10%도 쓰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우와! 이렇게나 많이….’ 감동의 물결이 파도치듯 카톡이 떴다.  

‘작아서 좀 그렇지?’ 했다. 그리고 ‘저녁 먹으러 어디로 갈까?’ 했다. ‘저녁은 뭐, 돈 들게’라며 물러선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앗싸라비야!!!’     




그리고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감각을 돌려 현실을 잊었다. 글 쓰고, 책 교정보고, 퇴고와 탈고를 이어가면서 혼을 빼앗겼다. 그리고 점심을 챙겨 먹기 위해 일어났다. 그래도 이 알 수 없는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슴에 휑한 바람이 뚫고 지나간다. 일단 배를 채운 뒤 생각하기로 하였다. 끓는 물로 즉석 미소된장국을 준비하고, 냉장고에 넣어둔 찬밥 재차 꺼내 전자레인지 1분30초 간 데웠다. 구운 김에 단무지와 김치, 시금치 무침, 어묵조림을 넣고 한입 크기로 말아서 해결하였다. 내가 좋아해 자주 해결하는 약식 김밥이다.      


식곤증이 밀려들기 전에 미역을 물에 불려놓고,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입술이 닷 발로 튀어나온 총각이 운영하는 단골 푸줏간에서 안창살과 토시살을 충분히 샀다. 그리고 국거리도 약간 구매해서 집으로 왔다. 딸아이에게 저녁에 케이크 준비해서 오라고 명해놓고 보니 마음이 바쁘다.      


불린 미역을 잘 씻어 물기를 꼭 짰다. 큰 냄비를 불에 올려 충분히 달군 후 참기름을 두르고 쇠고기와 함께 미역을 볶았다. 설탕 약간과 간장으로 밑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냉장고에 남은 육수를 붓자 ‘자자작!’ 하는 맛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물이 모자라는 것 같아 다시마를 넣고 생수를 조금 더 넣었다. 미역이 부풀어 오르며 거품이 냄비 가장자리에서 보글보글 일어난다. 재차 간장으로 간을 맞추었다. 진한 국물이 깊은 맛을 낸다. 비주얼은 물론 맛 역시 흡족하였다. 한소끔 더 끓이고 불을 껐다.   

   

자찬하자면, 나는 맛을 평하는 맛 작가다. 경상북도 내 127곳 식당을 돌며 취재해 400쪽이 넘는 책을 엮었던 과거를 떠올리자, 어깨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경상북도 면서기가 추천하는 단골 맛집’ 제목이 멋지지 않은가? 다양한 요리를 맛보면서 원고료도 짭짤하게 챙겼으니 일석삼조였다. 하긴 하루에 메기매운탕만 다섯 끼를 맛본 적도 있었다. 먹는 것도 고통이라 세상 참 공평하지 않았다. 입에서 살아 있는 메기가 꾸물대며 나오는 것 같았다.      


각설하고, 오전에 쓰던 글을 재차 열고 읽고 수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해가 떨어지자 그늘이 찾아왔다. 내 마음이 이상하게 그늘진 만큼 어둡다. 혹 싶어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살이 심해 도무지 올 수 없는 상태라며 울먹인다. 나도 울먹였다. 하필이면.......,


저녁은 갓 지은 쌀밥에 미역국과 투 뿔 쇠고기 구이로 해결하였다. 안창살에 토치로 불맛을 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 먹고 난 뒤 설거지하는 동안 후회가 밀려들었다. 식당에서 손님 대접받으며 먹는 것보다 노동력은 물론 돈도 그만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크는 결국 자르지 못했다. 뱃살공주님께서 그런 것에 돈을 쓸 수 없다는 투철한 절약 정신에 우리는 동참하였다.      


용돈 잘 쓰겠다는 인사말을 뱃살공주로부터 들었다. 나는 이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꼭 당신만을 위해서 써야 해요.”

흐흐흐…….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백사 이항복과 우정을 나누었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말이 생각났다. ‘검소한 사람은 절약을 일삼아 언제나 남을 도울 여유가 있지만, 사치하는 사람은 항상 모자라므로 남에게 인색할 수밖에 없다’ 우리 뱃살공주님께서는 너무나 검소하셔서 사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을 돕는 일도 없지만 말이다.     




다음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에 아내가 집을 나갔다. 나도 복잡한 일이 있어 오전에 집을 나섰다. 그리고 끝내 해가 떨어지고 막걸릿집을 들른 후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뱃살공주가 환하게 맞이한다. 이상한 일이다. 결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


“혹 스벅 케이크 주문했어요?” 한다.

그런 적이 없다. 산맛 커피를 즐기는 나는 스벅 커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케이크 따위는 오는 길에 사 왔으면 사 왔지 인터넷으로 주문하지 않는다.      

“아니?”했다. “그럼 누구지?” 하며 잘 포장된 스티로폼 상자를 보여준다. 동과 호수는 맞는데 성과 이름 끝 자가 다르다. 누가 봐도 대번에 우리 것이 아님을 직감하였다. 이미 겉포장이 뜯긴 상태지만, 속 포장은 온전하다. 뱃살공주님께서 어제가 자기 귀빠진 날이라 흥분한 상태에서 확인조차 하지 않고 포장을 뜯었던 것이다. 길 잃은 케이크를 위해 아들이 택배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문한 사람이 자기 집임에도 동과 호수를 잘못 썼다. 우리 아래아래 아랫집 케이크였다. 휴대전화나, 컴퓨터 자판에 9자와 6자가 아래위로 이웃하고 있음을 알았다.      

울 뱃살공주님 잠시 좋다 말았다.

아들이 직접 배달을 다녀왔다. 뱃살공주님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갑자기 케이크가 먹고 싶다.”

애절한 목소리였다. 마치 눈앞에 케이크가 아른대는 듯하였다.

“사… 올 까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휴~ 다행이다. ‘눈으로라도 맛 봤으면 됐다.’ 하려다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까 애써 참았다.     


그 사람 하필 우리 집 동호수를 써서 평안한 집안에 풍파를 일으키는지 원! 앞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인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결론이다. 나는 일박이일 동안 더 할 수 없는 만족이 찾아와 부(富)를 경험하였으며, 한나절이지만 자전거로 귀(貴)의 수준에 닿았다. 그리고 글쓰기와 읽기를 거듭하였으니 식견을 넓혀 빈(貧)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뱃살공주 앞에서 설설 기면서 기개 따위는 개나 줘버렸으니 천(賤)애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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