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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Dec 07. 2023

오늘은 모처럼 바쁜 날 2

나무관세음보살!!!




세상에서 알아서 하란 말이 제일 무섭다. 자기는 할 말 다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후 판단은 네 몫이고, 뒤에 어떤 일이 생기도 네 책임이라는 의미다.   

  

갈등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화가 살짝 치미는 듯했지만, 이 정도로 움직일 내가 아니다. 머리 회전이 빨리 돌아가며 철저한 아이데이션에 돌입하였다. 시간차 분할과 일의 선후와 일정의 중압감으로 나눴다.      

집안을 뒤졌다. 다용도실에 처가에서 가져온 배추 6포기가 신문지에 착착 감겨 놓였다. 그렇다면 저녁에 도착할 배추는 영양 고랭지나, 해남 바닷가에서 생산된 절임 배추란 뜻이다. 판단은 빠를수록 좋다. 실행에 옮겼다. 배추절임용 비닐 백을 찾았다. 배추를 사 등분하여 왕소금을 속속들이 잘 뿌려 주었다. 그리고 물을 자작하게 붓고 비닐을 꼭꼭 묶어 베란다에 두었다. 배추가 소금에 잘 스며들기를 기원하면서…. 배춧잎 중 끝부분보다 굵은 흰 부분에 소금이 잘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우리 집 가훈이 ‘배워서 남 주자, 보증을 서지 말자, 오늘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다. 스토리텔링 강의원고 정리는 내일로 미뤄야 한다.

그러나 배고픔은 참을 수 없었다. 최대한 간편하게 해결하기 위해 생김을 살짝 구워 네 등분으로 나눴다. 냉장고에 숨죽은 찬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간 돌리자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김밥용 단무지 반으로 자르고 재차 세로로 얇게 갈랐다. 우엉조림과 김치를 준비하였다. 채소 칸에 잎이 넓은 상추를 씻어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국물이 필요하다. 즉석 일본 된장을 끓는 물에 풀었다. 완벽하다. 사 등분 한 김에 상추와 밥을 올리고, 단무지 우엉과 김치를 넣어 꼬마김밥을 말아서 먹었다. 하나에 딱 두 입이면 충분하고, 입에 착착 감기는 김밥은 씹을수록 다양한 맛이 우러나 입을 호화롭게 한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나는 저렴한 입이다.      




대충 입을 헹궜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뱃살공주님께서 하명한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양에 기가 죽었지만, 예서 말 수는 없다. 고개가 아프다.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마늘 까기를 활용하였지만, 역시 더디다. 벽에 붙은 전자시계가 3시를 압박하고 있다. 손놀림을 빨리했지만, 결과는 껍질이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물에 담가 놓으면 불어서 저절로 떨어진다는 것쯤은 선험적 경험으로 안다. 마늘 까기가 끝나자 4시다.      



대충 샤워를 했다. 오늘 처음 하는 양치질이다. 물기를 닦고 오늘의 날씨를 확인한 후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백팩을 챙겨 등에 매고 거울 앞에 섰다. 각질 벗겨진 피부 하며, 자갈밭에 풀이 돋은 듯 듬성듬성하게 자란 흰 터럭, 게슴츠레한 눈이 삼위일체로 어울리며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비주얼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 찜찜하다. 뭔가 하나가 빠진 듯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베란다에 생강이 떠올랐다. 그냥 나갈 수 없다. 재차 들어왔다. 그렇다고 지금은 생강 껍질을 벗길 수는 없다. 화가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대부 출신이 대상 없이 화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내 합리적인 정신 승리법이 가동되었다. 배추를 소금에 절여 놓았으니, 생강은 물에만 담가 놓아도 그냥 넘어가리라 확신하였다. 뱃살공주님 구겨진 얼굴이 떠올랐지만, 금세 지워버렸다.  

   



급한 걸음으로 출판사에 들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 시간이 쏜살같다. 일정 검토하고, 배포계획도 의견을 나누었다. 홍보를 위한 방안도 출판사 대표와 머리를 맞대었으나 역시 결론은 경비다. 오늘 대화의 결론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헤어졌다. 삑사리 연주 연습실을 향해 열심히 걸었다.




두 시간 연습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상한 불안감이 피어올라 서둘러 마치자는 나의 제안에 동조한다. 그래도 저녁은 먹고 헤어지자는 뜻에 따라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을 반주 삼아 비웠다.      


역시 나란 인간은 술이 들어가야 정신이 온전하게 찾아온다. 없던 용기도 생기고, 만용에 가까운 객기도 쉬이 부푼다. 모처럼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왔다. 의외다. 집안이 잠에 빠진 듯 조용했다. 큰방 문을 열었다. 아직 뱃살공주마마가 귀가하지 않았다. 카톡을 여니 입사 동기들 만나 수다 떨며 저녁을 해결하고 온단다. 맥이 풀려버린다. 밀도가 높았던 피가 재차 묽어지면서 피곤이 밀려들었다. 냥이들 간식 챙겨 먹이고, 물그릇 잘 씻어서 갈아주었다.      


간단하게 손발만 씻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브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손전화기를 통해 오늘 삑사리 연습 동영상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만의 여유다. 10시가 넘자 아침에 집을 나갔던 아내가 돌아왔다. 거실로 마중 나갔다. 주방 바닥에 옷을 벗은 하얀 마늘을 보는 그녀 표정을 살폈다. 변화가 없다.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깔아 분위기를 잡았다. 최소한 자긍심의 발로다. 그러나 물에 젖은 생강을 보며 얼굴이 미미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살짝 부정적임을 직감했다. 몸속 피가 재차 뻑뻑해지는 듯하다.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거실에서 아내와 눈을 맞추기 위해 기다렸다. 무슨 말이라도 들어야 메말랐던 가슴이 해갈될 듯해서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벽에 걸린 수건을 벗겨 발을 닦는다. 발가락 사이까지 꼼꼼하게 물기를 제거한다. 어? 저건 방금 내 얼굴 닦았던 수건인데, 하며 물었다.


“벽에 걸린 수건 발 닦는 거예요?”


고개를 들고 당연하다는 듯 본다. 아내가 발가락 사이를 후비듯 닦은 수건으로 지금까지 내 얼굴을 문질렀다? 뭐 이런 불쾌한 일이 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문에 걸린 수건이 발 닦는 용 아니었어요?”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들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얼굴을 붉히며 이런다.

“문에 걸린 거는 얼굴 닦는 수건인데요?” 한다. 목에 책받침 쪼가리가 걸린 듯했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나는 문에 걸린 수건이 발 닦는 거로 알았는데….”


비겼다. 이만하면 됐다. 언제부턴지 알 수 없지만, 이 몸이 발을 닦은 수건으로 아내가 얼굴을 닦았고, 아내 발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았으니 나로선 뭐 그리 손해 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진작 말을 하지…….”


“당신 무좀 발 닦던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았다고요? 일부러 구분해 놓았는데!”     

역시 소통의 단절은 사건을 부른다. 일단은 현장을 벗어나야 한다. 재빠르게 내 방으로 들어와 노트북을 켰다. 화난 목소리로 거실을 장악하던 공주께서 더 크게 뭐라 했다.

“저 배추는 작아서 네 등분 하면 안 되는데! 두 등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한다.     

아내가 소금물에 절어 조막만 한 배추 하나를 앙증맞게 들고 있다.  

“시키는 일은 안 하면서 시키지 않은 일을….”

나는 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을 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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