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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Nov 23. 2023

아침에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2

혼자 놀기에 달인이 전하는 말



대략 시간이 11시가 지나고 있다.


읽지 않고 쌓아놓았던 책, 내게 가장 불만이 많아 보이는 책을 잡는다. 그리고 독서삼매경? 천만의 말씀, 생소한 지식, 새로운 단어의 조합,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철학적 문장을 메모하며 읽는 까닭에 진도가 더디다.


그러다 문득 총천연색인지, 흑백인지 가물가물하는 어젯밤에 온전히 정신을 지배당하며 꾸었던 꿈도 함께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밤새 탈탈 털린 영혼이 온전하려면 기록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메모해둔 수첩을 한 번 더 읽는다. 고개를 심하게 끄덕일 때가 있다. 만족스러운 독서였단 뜻이다.     


꼬르륵 소리와 함께 배가 고프다. 충성스러운 내 배꼽시계는 틀림없다. 12시가 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점심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주로 라면이나, 메밀소바, 봉지냉면,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는다. 아니면 컵라면에 밥과 김치를 곁들여 간단하게 해결할 때도 있다.


게맛살과 호두 간장에 조린 것을 잘개 잘라서 함께 넣으면 맛이 더 뛰어나죠. 혹 우엉 조린 것 있으면 함께 넣어도 색다른 맛입니다. 오늘은 맛살과 호두만^^*..



간혹 반찬 남은 것에 단무지만 넣어 김밥도 말고, 유부초밥을 만들어 된장국과 해결할 때도 있다. 몇 조각 남으면 쉬이 상하지 않게 큰 볼에 아이스펙 넣고 그 위에 초밥 접시를 올려 뚜껑을 덮어 둔다. 아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허기를 면하라는 남편의 넘치는 지혜다. 물론 점심 먹은 설거지는 곧바로 해치우고 마른행주로 말끔하게 물기를 닦아 원래 자리에 재워 놓는다.      


주린 배를 달랜 뒤, 따뜻한 차를 우려 조금씩 음미하며 창밖을 바라보다 감상에 젖는다. 이때가 되어서야 계절이 오가는 것을 느낀다. 까치가 요란스러울 땐 혹 즐거운 소식이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다.


후다닥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반신욕(바쁠 땐 족욕으로 대신)으로 지금까지 묵은 땀과 때를 벗긴다. 이마에, 팔과 등짝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온몸이 열기로 회전을 거듭하며 살아 있는 세포가 죽은 세포를 밀어내는 아우성을 즐긴다. 냉수로 샤워한 뒤에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오면 이보다 상쾌할 수 없다.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이때를 허무하게 보내선 안 된다.      


컴퓨터를 켜고 폴더를 찾는다. ‘작업중’을 열고 새로운 글쓰기, 혹은 최근에 쓰기 시작한 글을 찾아 손가락 아프게 두드린다. 머리가 팽팽 돌 때면 손가락도 신명을 탄다. 마치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발바닥도 바닥을 툭툭 친다. 그러다 가장 흔한 단어나 용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무리하지 않는다. 쉬라는 의미다.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옮긴다. 젊은 아낙들이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떤다. 어떤 말이 오가는지 들리지 않지만, 정보를 공유하고, 인격을 나누며,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중이리라. 참 예쁜 사람들이다.      


정신을 차리고 90년대 후반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장을 노략질해 놓은 초서(抄書)를 연다. A4용지에 글자 크기 10포인트, 500매가 넘는 자료가 잠언, 논어를 비롯한 철학, 영화 명대사, 버리기 아까운 문장, 다산연구소, 한국고전번역원, 순우리말, 인물, 종교, 민속, 신화, 지리, 서적 등 테마별로 정리되어 있다. 검색엔진을 돌려 비슷한 문장이나 정보를 찾아 요리조리 비틀어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든다. 연암 선생이 ‘글항아리’라고 했고,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이 ‘연장통’이라고 했으며, 다산 선생이 초서라 하였다.      


나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메모하는 습관을 길렀다. 메일 중에서도 기억해 둘 만한 문장이 있으면 메모해 두곤 한다. 한 줄 메모가 아인슈타인의 머리를 능가한다는 진리를 맹신한다. 일주일에 모아서 초서에 기록해 두고 있다. 정말 답답할 때 최고의 해결책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과 문장이 귀신같이 떠오를 때가 있어 스스로 대견해할 때도 있다. 아니면 어느 책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음을 확신 들 때도 있다. 그 책을 찾아보면 원하는 정보가 들어 있어 틀리지 않았음을 기뻐한다.   

   

벽시계가 오후 4시를 넘기고 있다. 이때 가장 갈등이 심하다. 친구와 약속을 정할 것인가? 아니면 단골 막걸릿집으로 직행? 시기에 따라 출판사나 기획사 방문도 가능하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걷기운동 역시 좋아하는 코스다. 아니면 서로 동선을 연결해서 마지막은 막걸리로 해갈하는 방법도 있다. 그날의 기분과 생각과 판단에 맡긴다. 그리고 날씨를 확인하고, 옷을 선택하고, 패션을 완성한 후 전신 거울에 서서 살아 있는 온전한 나를 본다.     

 

걷기, 하루 5천 보는 걸어야 성이 찬다. 내 동선이 모두 걷기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다. 물론 집으로 돌아올 때도 걷는다. 요구르트 섞어서 막걸리 한두 병? 아니면 놋그릇 왕대포 석 잔이면 만족한다. 다음날 장운동이 무척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7시 반을 넘기지 않고 집에 들어와 목을 빼고 능청을 떤다. 하루 종일 뱃살공주님을 기다린 것처럼….      




*

추신: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밥솥에 밥이 남아 있으면, 김치찌개나, 미역국을 끓이든가 아니면 주로 양념이 된 돼지고기를 굽는다. 간혹 치킨을 시켜서 먹을 때도 있고, 마마님께서 오실 때 맥주 안주에 딱 맞는 피자를 들고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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