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필우입니다 Nov 30. 2023

오늘은 모처럼 바쁜 날 1

나무관세음보살!!!



모처럼 바쁜 날이다. 실업자가 바쁘다는 것은 곧 기쁨이 충만한 하루가 될 거라는 김칫국을 마신다. 출판사, 강의 원고 수정 및 파일 정리 , 저녁에 삑사리 연습이 있는 날이다.      


새벽 6시 반에 일어나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 입고 공원에 나갔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목덜미와 귀가 시리다. 그렇지만 요 며칠 운동을 쉬었던 탓에 작정하고 시간을 채울 요량이다. 하루를 건강하고 긍정적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수다. 그럭저럭 운동기구에 몸을 기억시키고, 하체와 상체운동을 번갈아 가며 했다.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심적 안정감에 자존감까지 충만해짐을 느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오니 역시 아내가 없다. 식탁에도 싱크대에도, 가스레인지 위에도 아무것도 없다. 텅 빈 식탁만큼 마음에도 휑한 바람이 분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문득 영상 하나가 스쳤다. 콩을 삶고, 발효해서 청국장을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한 것일까? 청국장을 먹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어머니가 생각났다. 다시멸치는 없어도 좋았다. 안방 아랫목에 발효된 청국장 풀어, 두부 송송 썰어서 넣고, 무, 양파, 고추, 대파만으로도 콤콤한 청국장 향기가 온 집안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이보다 더 맛난 음식은 없지 싶다. 영상을 재생하지 않음만 못했다. 뱃속이 아우성친다.   

  

어젯밤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급하게 나간 흔적도 없다. 밥솥에 반 그릇쯤 되는 밥이 남았다. 라면 삶아 묵은김치와 함께 밥을 말아서 꾸역꾸역 삼켰다. 배가 부른 것이 아니라 성질이 부풀어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함께 산다는 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옵션이라 생각하며 아내 침대 정리를 했다. 




회한의 감정이 몰아친다. 고개를 흔들어 씬레드라인의 틈을 비집고 들어설 연민을 털어 냈다. 무한한 잠재력을 믿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최고의 선택을 향한 오늘을 시작하려 한다.     

때마침 전화기가 부르르 떤다. 출판사 대표다. ‘낱장의 행복’ 편집이 끝났으니, 교정 한 번 더 보라는 이야기다. 데이터를 받았다. 화면으로 교정 교열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눈곱만 떨어내고 뛰어나가 300쪽 프린트를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눈이 팽글팽글 돌도록 글자와 씨름을 하였다. 


고개를 젖히고 쉬면서 카톡을 열었다. 아내가 흔적을 남겼다.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 비우고, 화분에 물주라는 엄명이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아주 짧게나마 마음이 꿈틀대며 열풍이 일었다. 흔드는 것은 내가 아닌데, 스스로 흔들린다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느낌이 오늘의 이정표를 다시 세워야 할 것 같다. 막걸리를 추가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마음을 다독이며, 재차 프린트를 펼쳤다. 페이지가 보이지 않는 장이 있고, 삽화가 잘못 들어간 페이지도 있다. 따옴표가 잘못 찍힌 곳을 발견하면서 유레카를 외친다. 한계가 왔다. 아무리 다시 봐도 더는 오류가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내게도 활자의 마술이 펼쳐지는 가 보다. 활자가 수증기가 되어 흔적 없이 사라진다. 빤한 글임에도 눈에 익어 쉬이 지나침을 경계한다. 누구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우리 모두 결핍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극복한 자만이 갈채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 그러나 나처럼 나약한 인간은 끝끝내 보지도 만져본 적도 없는 신을 찾고, 의지하게 된다.      


결코 신이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차서 몇몇 오류만 수정 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하늘 뜻에 맡긴다. 그야말로 ‘盡人事待天命’ 주문을 왼다. 최선을 다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능력의 한계를 뚜렷이 느꼈다. 그때 출판사에서 정말 넘겨도 되냐며 재차 묻는다. 참 쓸데없는 질문이다. 이때 갈등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짧은 침묵 뒤, 애잔한 숨소리 속에 자승자박 비통한 외침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인내와 희망만을 요구했던 절박한 과거를 믿어야만 했다. 벽에 붙은 전자시계가 정오를 알린다. 진정 지금이 ‘하이 눈(High Noon)’이다. 피할 수 없는 결전, 확신에 찬 소리로 재차 소리쳤다.      


“예!”     


힘든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한숨이 쉬어 나왔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주 살짝 몸살기운이 돌았다. 긴장이 풀린 탓이다. 따뜻한 물로 정신을 지배했던 묵은 때를 벗겼다. 온 몸에 온기가 돌며 새로운 에너지가 솟는 듯하다. 예서 말 수는 없다.      


차를 우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음 달에 있을 스토리텔링 강의 원고를 펼쳤다. 그러나 배꼽시계가 아우성친다. 배고픔이 오늘 일정에 예상치 못했던 복병일 것만 같다. 이때 또 한 번 전화가 부르르 떤다. 공포의 떨림, 아내다. 피부가 함께 떨렸다.      

점심 먹었냐는 관심어린 질문은 기대하지 않았다. 저녁에 뭐할 거냐고 묻는다. 계획처럼 ‘삑사리’ 하모니카 연습하러 가야 한다고 했다. 짧은 침묵, 그 속에는 팔자가 늘어졌네! 그딴 거 할 시간이 있으면 돈 벌 궁리나 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별이 빛나는 밤(고흐)

내가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왜요?”

“오늘 저녁에 김장용 배추 도착할 건데, 저녁에 배추 절여야 하는데….”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마늘 껍질 좀 까놓지? 베란다에 생강도 있는데….”

모기보다 더 작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하모니카 연습…, 가지… 말까요?”

이때 가장 듣기 거북하고 갈등을 일으킬 대답이 들려 왔다.


“알아서 하던지!”

그리고 전화를 끊는다.


세상에서 알아서 하란 말이 제일 무섭다.

자기는 할 말 다 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판단은 네 몫이고, 

뒤에 어떤 일이 생겨도 네 책임이라는 의미다.

(계속)

이전 03화 아침에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며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